조직 테제 9. 당의 골간 체계는 순차적으로 건설되어야 한다.
하나의 씨앗이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는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물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당의 골간 조직을 세우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건설의 과정은 보다 장기적이어야 한다.
이번 총선이 끝나고 나면 진보신당 건설 운동은 무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노’이든 ‘심’이든, 그들이 국회의원의 지위를 유지하든, 그러하지 못하든, 그들뿐만 아니라 여러 정파의 수장들 모두 다시 평당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입버릇처럼 그런 선언을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어떠한 대표성도 없고, 아무런 권력도 위임받지 못한 자들이 과거와 현재의 영향력을 내세워 미래의 진보운동까지 장악하려는 시도는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40대 아저씨’들은 그들의 20대로 돌아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지금의 88만원 세대와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구상은 이러하다. 진보신당은 앞으로 1년 동안 지역의 기초자치체 건설 운동에만 매진한다. 당원들 각자는 어떻게 하면 하나의 밀알이 되어 지역 주민의 맘속에서 살아남을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창당 당시에는 중앙당대의원이나 중앙위원 등을 선출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 누구도 아직 당내의 활동을 통해 검증받은 자가 없기에 그런 권력을 수임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월권이다. 창당 당시부터 당원이 너무 많아 문제된다면, 단지 모든 당원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해 지역당의 대의원들만 구성하자.
그러고 1년이 지나면 지역의 토론 당대회를 열자. 그래서 지난 일 년 간 벌였던 각자의 활동을 보고하고 그 한계를 검토하며, 앞으로 지역의 진보적 재구성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토론하는 시간을 갖자. 지난 1년 동안의 실천이 활발했다면 그 토론 역시 생산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토론 당대회의 마지막 날, 일 년 전 모든 당원들 가운데서 추첨된 대의원들이 대의원대회를 열어 토론의 내용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사업계획들을 심의한 후 예산을 통과시키자.
중앙당의 대의원은 지역당의 대의원 가운데 결격 사유가 있는 자를 제외한 후 제비뽑기를 해 선출해야 한다. 진보정당의 대의원들이 고상한 이념이나 지식, 혹은 화려한 경력을 갖추고 있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의 마지막 2.3. 당대회는 정파조직들을 통해 걸러진 당의 대의원들이 얼마나 고루하고 비상식적인 인물들인지 백일하에 드러낸 당대회였다. 오히려 그런 인물들을 걸러내기 위해서라도 대의원들은 제비뽑기로 선출되어야 한다. 합리적 이성과 상식을 갖추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열정을 품고 있는 진보신당의 당원이라면 모두가 중앙당의 대의원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다만 지역대의원대회에서보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많을 것이므로, 일단 지역대의원대회를 통해 최소한의 활동이 검증된 당원들 가운데서 중앙당의 대의원을 뽑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1년간의 시차가 필요하다.) 물론 중앙당의 대의원대회 역시, 중앙당의 토론 당대회를 수일에 거쳐 치른 마지막 날,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열려야 한다. 우리는 그날 급진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앙위원회라 해서 특별할 것 없다. 민주노동당 중앙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라. 당원들의 기대수준에도 못 미치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니, 회의조차 참석하지 않는 중앙위원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그런 자들이 다시 정파의 힘으로 중앙위원으로 나서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중앙위원회도 마찬가지 원리로, 최초 당대회를 연 후 중앙당의 대의원 가운데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은 자들 가운데 추첨해 구성하면 된다. 그들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우려하지 않아도 좋다. 그럴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자진해서 추첨될 기회를 포기하면 되고, 3회 이상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중앙위원들은 그 즉시 그 자격을 박탈해 성원에서 제외하면 된다. 혹시 중앙위원들의 능력이 부족해 적절한 안건을 제출하지 못할까 염려할 필요도 없다.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기 이전에 이미 수일에 거쳐 토론 당대회를 열지 않았던가? 중앙위원회는 당대회에서 결정되고 기획된 사안을 충실히 이행하는 집행기구로 제 자리를 찾아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외의 당내의 대의기구가 아닌 각종 집행기구는 해당 역량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해야 한다. 그러니 이러한 집행기구에는 추첨의 원리를 적용할 수 없다. 중앙당의 사무총국이나 지역당의 사무국은 공채를 통해 역량 있는 인자들을 받아들이면 되기에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민감한 사안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신속히 결정해야 할 최고단위의 지도부는 해당 단위 전체 당원의 의사를 물어 선출할 수밖에 없다.
이때에도 우리는 이들 최고단위의 지도부들에 대한 검증만큼은 철저히 해야 한다. 사실 정보가 부족한 평당원들이 이들 지도부들에 대해 제대로 검증해 내기는 어렵다. 따라서 각종 공직선거를 통해 대중들에 의해 검증되고 심판된 인자들이 당의 지도부를 구성하도록 해야 한다. 달리 말해 민주노동당에서 지켜졌던 공직과 당직의 겸직 분리는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지역당과 중앙당의 지도부는 공직 선거에서 선출된 인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될 것이다. 그 공직 선거에 나올 입후보자들은 지역의 각종 기초자치체의 연대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추천될 수 있을 것이다.
최고위원회 등의 구성에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정파등록제가 어느 정도 활용될 수도 있다. 단 이 경우에도 등록된 정파의 후보군을 보고 당원들이 투표로 선출하는 것이 허용될 뿐, 정파에 등록한 당원수에 비례해서 정파 간 지분을 나누는 식의 행위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최고위원회와 같은 기구에서 다수파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이 문제된다면, 당원들이 선출할 권리를 제한하고 지분을 나눌 것이 아니라, 화백제도처럼 최고위원회에서의 만장일치를 요구할 일이다. 설령 만장일치가 되지 않아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