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지표들]
- "당신에게도 좋은 삶의 지표가 여럿 있었음 좋겠습니다!"
자본론과 더불어 맺은 인연 하나가 제게 묻더군요.
“선생님의 삶의 지표 같은 게 있으신가요? 쓰신 글이나 인터뷰등을 보다보니, ‘진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희망이 되고자 한다’ 뭐 이런 것이 선생님이 정치적 신념이신 듯한데, 다른 무엇이 있느냐”고.
제가 그이에게 되물었습니다.
“생명처럼 소중한 아내 이런 것은 배우자와 관련된 내 삶의 지표이고,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희망이란 것은 (과거 내가 속했으나 지금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버린) 민주노동당의 초심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실천의 지표중 하나이기도 하고 등등 여럿 있는데, 그게 왜 궁금하냐고?”
그랬더니 그이가 말합니다.
최근에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했는데, 앞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의지할 수 있는 삶의 기준 한 가지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이와 꽤 오랫동안 통화를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마음속으로는 내 삶의 지표들을 여럿 정해놓고 살아왔는데 정작 이를 정리해둔 적은 없었다는 생각. 분명히 살아오면서 크게 의지가 되거나 나를 다독여 온 것들인데, 그리고 종종 자기점검이 필요할 때 떠올려 보면 도움이 되는 것들인데...
그래서 정리해봤습니다.
비록 늘 항상 이들 삶의 지표들을 지키고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특히 경제적 곤궁에도 불구하고 지키려 애쓰고 ‘일반적인 수준에서’ 때론 의지하고 때론 자신을 추스르는 기준으로 삼고 살아온 내 삶의 지표들이 무엇인가고.
주요한 것들을 정리해보니 대강 다음과 같더군요.
하나. 희망적인 삶, 깨끗하고 맑은 정신으로 살자(Hopeful Living, Clean and Fresh Spirit)
두울. 삶과 사회적 사랑(Living & Social Love)
셋. 우선 긍정하라! 부정은 다음 문제(First, Positive. Negative, next problem)
넷. 자기 혁명, 나는 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다!(Self-Revolution, I always try to seeking for 'the truth')
다섯.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 진정한 혁명을 위하여!
A Economic Liberation of Working Class, For Real(Genuine) Revolution!
그러고 보니 좀 많이 거창하고 내 삶의 지표가 이것이다고 공개적으로 내놓기에는 어딘지 쑥스럽기도 한데, 역시 정리하지 않았을 때보다 정리해 두는 것등이 좋겠다 싶습니다.
더구나 마음속에 두는 것보다는 아예 공개함으로써 앞으로도 가급적 엇나가지 않게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하나. 희망적 삶, 그리고 깨끗하고 맑은 정신으로 살자
Hopeful Living, Clean and Fresh Spirit
“우주의 나이 아니 인류의 나이에 비해서도 보잘것없이 짧은 인생. 그렇다고 불가피한 사유로 정신장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사고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는 어린 시절의 생각⋅경험 등 때문에 일찌감치 삶의 지표가 된 것입니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찾아 그런 삶을 살고자 하거나 또는 과음을 유발하는 술자리 등을 거의 하지 않는 등의 실천적 사고⋅생활습관 등을 갖게 한 삶의 지표이기도 합니다.
두울. 삶과 사회적 사랑
Living & Social Love
생명이라면 모두가 나고 죽는다는 너무나 당연한 자연사적 과정을 밟게 되며, 또한 그 과정 중에는 변화발전(심지어 정체⋅퇴행)이라는 무궁무진한 꿈틀거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하게 된 이후,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젊은 시절의 고뇌를 거치며 형성된 삶의 지표입니다. 특히 지금의 삶의 지표는 칼 맑스의 자유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했던 에히리 프롬(E. From)의 [사랑의 기술]등 여러 저서들에서 영향받은 바가 큽니다.
‘사회적 사랑’을 실천하는 삶, 즉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더 바람직한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나눠줄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참 어려운 과제지만 ‘알버트 슈바이처’처럼 ‘칼 맑스’처럼 끊임없이 정진하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발전된 자유인들의 연합체'에서라면, 사회적 사랑의 일정한 완성형태(스스로를 위한 삶이 자연스럽게 사회구성원 모두를 위한 능동적인 삶이 되는 상태)는 자연스럽게 사회법칙의 하나로 받아들여질 터이지만...
세엣. 우선 긍정하라! 부정은 다음 문제
First, Positive. Negative, next problem
모든 사물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마주하는 상대들도 마찬가지이고, 심지어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이자 사회적 관계의 산물인 자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종종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먼저 보고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종종 해당 사물과의 불필요한 갈등⋅긴장관계 심지어 적대관계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사물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우선 보고 해당 사물에 대한 일방적인 긍정⋅몰입⋅배타적 지지를 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사물의 긍정적인 측면을 놓침으로써 “불필요한”(결코 필요하거나 불가피한 갈등 등이 아닌 “불필요한!”) 갈등⋅적대를 해야할 이유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내 삶의 지표는 “사회적 삶에서 사고의 기초나 관계의 기초 등을 이해할 때는 이런 이중적인 측면을 다소 병행하면서 순차적으로 이해할 때 가장 바람직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결론을 통해 형성된 삶의 지표입니다. 비록 제가 더욱 천재적 통찰능력을 보유했다면, 선후 구분 없이 “동시에”였을 것이지만.
다른 한편 “First, Positive. Negative, next problem”는 제 삶에서 “판단보류 또는 판단중지 상태”를 종종 야기하기도 합니다. 이중적인 측면이 이해되기 전까지 “판단보류 또는 판단중지”를 함으로써 판단의 오류와 실천적 오류를 감소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실행의 신속성 등을 떨어뜨리는 약점이자 동시에 실행의 오류를 감소시키는 장점으로 기능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네엣. 자기 혁명, 나는 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Self-Revolution, I always try to seeking for 'the truth'
“무지는 충분한 이유가 아니다!”는 스피노자의 경구,
“진리와 벗 모두를 사랑해야 하지만 진리를 더욱 사랑해야 하는 것이 학자의 겸허한 태도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
“나는 과학적 비판에 근거한 의견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한다. 그러나 내가 한 번도 양보해본 일이 없는 여론이라는 편견에 대해서는 저 위대한 플로렌스인(단테)의 다음과 같은 말이 항상 변함없이 나의 좌우명이다. ‘제 갈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칼 맑스의 학문에 대한 단호한 태도 등을 이해하게 된 이후, 자연스럽게 생활화된 삶의 지표입니다.
다섯.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 진정한 혁명을 위하여!
A Economic Liberation of Working Class, For Real(Genuine) Revolution!
특히 칼 맑스의 자본론과 더불어 형성된 삶의 지표이기도 하며, 그동안의 사회운동⋅노동운동의 영역에서 보여준 국가주의적 사고와 실천의 오류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형성된 삶의 지표이기도 합니다.
즉, 자본중심⋅국가중심 등의 경제적 계급질서를 노동중심으로 완전히 재편할 때만 인류가 사회적 삶의 공간으로 마주할 수 있는 사회(노동자 계급이 경제적으로 해방된 사회 또는 자유로운 공동체 사회), 이런 사회를 꿈꾸며 그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하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이십대 이후 제 삶의 대부분을 채워 놓고 있는 실천적 삶의 지표이며, 또한 바로 이런 삶의 지표들로부터 또 다시 파생된 삶의 지표들(“씨알맹이 굵은 종자가 되자”등)도 여럿 갖고 있습니다.
송태경 2007년 12월 9일에 씀(08/3/8 민노당 관련부분 본문 괄호내용 추가등)
p.s “내 삶의 지표들”을 정리해두는 계기를 제공해준 그이에게도 지금의 어려운 처지에서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튼튼하게 지탱해주는 삶의 지표가 여럿 생겼으면 좋겠고, 이 글을 우연찮게 읽게되실 블로거님들도 좋은 삶의 지표들이 여럿 있었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