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 칼럼] 진보신당을 위하여

선거철이 되니 낡은 구호가 다시 들린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집안싸움 중인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권력교체의 위력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재야 시민사회 진영에서는 아예 대놓고 모든 야당을 향해 반MB연대에 참여할 것을 윽박지르다시피 강요한다. 하지만 민주당에서 민주노동당까지 대다수 야당은 굳이 요구하지 않아도 반MB연합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국회 의석을 가진 정당 가운데 압박의 대상이 되는 정당은 진보신당뿐이다. 그리하여 태어난 지 고작 2년에 국회의원을 겨우 한 명 배출한 이 왜소한 정당은 덩치 큰 정당들과 여론의 압박에 어쩔 줄 모르고 진땀만 흘리고 있다.
하지만 슬퍼하면 안 된다. 바로 그것이 이 땅의 약자와 소수자의 운명이니, 진보신당은 그들의 고통을 지금 같이 겪는 것이다. 이 땅에서 소수자와 약자는 존재 그 자체가 과오요 죄이며,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다. 그들은 없어지거나, 아니면 주류와 다수자에게 동화되어야만 한다. 소수자와 약자에게 존재 자체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탐욕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가장 뿌리 깊은 폭력성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이 용산 철거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소수자로서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비난받을 과오가 되는 곳이 한국 사회다. 진보신당은 정치권의 철거민이니, 그들이 추방되고 갈 곳 없이 떠도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갈곳없는 정치권의 철거민 신세
덩치 큰 정당들이 진보신당에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몇 푼 보상금을 줄 테니 떠나라는 것이다. 더러는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어찌 막겠는가. 하지만 누군가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추방당한 약자들 편에서 우리를 추방하는 자들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누가 우리를 추방하는 자인가? 자본이다! 용산의 철거민들을 추방한 자가 삼성건설을 비롯한 자본이었듯이, 진보신당이 정치권의 철거민 신세가 된 것도 근본에서 보자면 자본과의 치명적 불화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진보신당이 할 일은 자본과의 중도통합론 위에서 진행되는 반MB연대의 들러리를 서는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자체를 흔드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사람들은 철없는 근본주의라 몰아붙이지만, 그들이야말로 근본주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왜 우리는 삼성 제품 불매운동을 시작하지 않는가? 자본은 노동자와 소비자에게 기생하는 흡혈귀이다. 그러므로 삼성 제품을 불매한다는 것은 그 자본이 딛고 선 토대의 절반을 허무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 제품 불매운동이 하루아침에 삼성을 망하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조선일보를 보지 않는 것이 진보적 교양이 되었듯이, 적어도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삼성 휴대폰, 삼성 노트북, 삼성 보험, 아니 어떤 삼성 제품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보적 문화로 만들 수는 있다. 더 나아가 세계화된 시대에 진보신당의 모든 당원이 작심하고 달라붙으면 전 지구적으로 삼성 제품 불매운동을 벌일 수도 있다. 왕의 국가가 시민이 주인인 공화국이 되었듯이, 자본가의 소유물인 기업이 노동자가 주인인 공공적 삶터가 되게 만들려면, 그렇게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무리 남루한 역사라도 뒤로 갈 수는 없다. 민중들이 피 흘려 몰아낸 독재자의 자리를 자본가들이 차지해 버린 지금, 누가 독재타도란 구호에 가슴이 뜨거워지겠는가.
자본과 비타협적 싸움 시작할때
그러므로 지금은 독재권력이 아니라 자본권력에 대항해 새로운 전선을 형성해야 할 때이다. 언론소비자주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고발당하고 재판받으면서도 눈물겨운 싸움을 이어가듯이, 진보신당이 정말로 미래의 주인이 되기 원한다면 더 늦기 전에 자본과의 비타협적인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싸우는 사람이 박해받아도, 민중은 냉담하게 침묵하고 방관하겠지만, 그렇다고 행여 민중을 불신하거나 서운해할 일은 아니다. 민중이 방관하고 침묵하는 것은 우리의 신념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성숙을 기다려주는 배려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시험이 끝나고 성숙의 때가 오면, 민중은 다시 우리를 부를 것이니, 부디 흔들리지 마시라. 영원 전부터 밤은 아침의 전조이다.
김상봉 | 전남대 교수·철학
입력 : 2010-01-26 17:55:54ㅣ수정 : 2010-01-26 17:55:55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