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얼마나 버나?”
자연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 복잡한 사물들을 식별하는데 단서가 되었던 원, 구, 테두리, 중심점, 두 개의 선, 꺾임점 등 ‘메타패턴’이라 부르는 이러한 기하학적 형상들을 지각함으로써 예술은 나타났다고 합니다. 동굴 벽의 불규칙한 표면이나 한 그루의 나무에 목탄으로 그려진 몇 개의 원과 직선, 곡선의 조합을 보고 ‘사람’, ‘여자’, ‘들소’를 연상하는 것은 이러한 단순한 패턴의 조합만으로도 인간의 시각과 기억이 양태를 구분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물의 양태를 인식하는데 ‘선과 점, 곡선과 직선의 조합’이라는 분석적 언어가 아니라 ‘사람, 여자, 들소’ 등 표상하는 이미지로 인식하는 최소한의 인식능력을 공유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언어의 사회성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언중들간의 사회적 약속이고 그 언어는 사람들 사이에 분석적 논리나 개념과 함께 포괄적인 ‘메시지’로 교류되는 것이고 ‘어휘’나 어법 또한 ‘습관’으로 굳어지고 사건의 발생이나 새로운 개념의 등장으로 변화하기도 합니다.
정치인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메시지 전달은 특정 정치집단이나 개인의 정치적 지향과 사건에 대한 태도를 최대한 날것으로 드러내는 노력이고 발화자와 대중의 인식체계나 정치적 태도가 다른 상태에서 발화자의 어법을 대중에게 강요하기 보다는 집단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정치활동중에 개인의 습관이나 인식의 차이로 인해 비문의 사용이나 불완전한 어법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 나경원이 인터뷰 중 ‘우리 일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크게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나중에 이에 대한 나경원의 변명을 들어보면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집’, ‘우리 회사’, ‘우리 손주’ 등 흔히 사용되는 ‘우리’라는 말은 지칭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거나 ‘우리 커피한잔 할까?’등 완곡한 요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를 나경원의 어법에 그대로 인용하자면 ‘우리 일본’이라는 말은 나경원의 ‘넘쳐나는 일본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할 수 도 있겠으나 사실 그냥 입에 붙은 언어습관이라는 나경원의 변명은 그리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나경원에 대해 쏟아진 비난은 사실 이전에 보여온 나경원의 친일적 행각이나 퇴행적 정치행태에 대한 시민들의 누적된 분노표출이라 보는 것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듯...
한때 커뮤니티 안에서 대중과의 접촉면을 확대하자고 ‘썬데이서울’이라는 주간지를 돌려보던적이 있습니다. 그라비아 수준의 화보와 가십성 기사들로 가득한 잡지로 ‘서태지, 얼마나 버나?’라는 제목을 표지에 크게 카피하고 본문 기사에는 선택 불가능할 만큼의 다양한 추정치만 나올 뿐 결론은 없는... 얼마 못가 그냥 흐지부지 잊혀졌지만 경직된 ‘운동권’이 나름대로 시민과의 공감대를 찾기 위해 가십기사라도 찾아 보려는 노력은 그리 나쁜 시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의 언어는 정제되고 절제되어야합니다. 그러나 발화자의 메시지나 의도를 덮어버릴 정도의 검증은 자칫 자기검열과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과도한 피로감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 드러나는 구석기인의 의식은 미시적 점과 곡선의 배치가 아니라 구체화된 동물의 형상에서 나오는 ‘메시지’의 번역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