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왕 사메트니우스가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붙잡혔을 때, 캄비세스는 이 포로에게 모욕을 주고자 하였다. 그는 페르시아의 개선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사메트니우스를 세워둘 것을 명령하였다. 또 그는 계속해서 그의 딸이 물동이를 가지고 우물로 가는 하녀의 모습을 하고 그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도록 하였다.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이러한 관경을 보고 울고 슬퍼하였지만 사메트니우스만은 혼자 눈을 땅에 떨어뜨리고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러고 난 후 곧 그의 아들이 처형을 당하기 위해 행렬 속에 함께 끌려가는 것을 보았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꿈쩍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후 그의 하인들 중의 한 사람인 눍고 불쌍한 남자가 포로행렬 중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바로 그 순간, 그는 손으로 머리를 치면서 가장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온갖 표식을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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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는 이 이집트 왕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왜 그가 하인을 보자 비로소 슬퍼하였던가를 자신에게 묻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해 몽테뉴는 "그가 이미 너무나 슬픔에 차 있었기 때문에, 그 슬픔이 조금만 더 커지더라도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터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또 "왕의 가족들의 운명이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운명이 곧 자신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삶에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무대 위에서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따라서 이 하인은 왕에게는 단지 한 사람의 배우였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아니면 "커다란 슬픔은 정체되었다가 이완의 계기가 와야만 비로소 터진다. 이 하인을 보는 순간이 바로 이 이완의 순간이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로도투스는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설명도 부가하지 않았다. 그의 보고는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보고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로부터 유래하는 이 얘기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경탄과 깊은 명상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수천 년 동안 피라미드의 방에 놓여 있으면서도 오늘날까지 그 맹아적 힘을 보존하고 있는 한 알의 씨앗을 방불케 한다.
('얘기꾼과 소설가 ' in :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역) pp.173-4)
ps.
벌써부터 성급하게 심리학자들까지 동원해 억지로 자살의 동기를 설명하려는 언론의 태도가 짜증이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