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고 그름을 떠나서 음미해 볼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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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했으면...
오죽했으면 죽었을까... 요즘 최고의 화두가 아닐까? 앞으로도 한동안 대정부투쟁에 사용될 말이기도 하겠다. 그 오죽했으면...
반대말로는 아마, 죽을 각오면 살아라... 쯤이 될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조건에 따라서 이 두가지의 말은 자주 사용되는데, 어느 쪽이 맞는 말일까? '오죽했으면', 과 '죽을 각오로 살아라...'
놀라운 것은, 오죽했으면... 이라는 막연한, 밑도 끝도 없는 우리네 초코파이 정서가 어느 이름없는 농부의 죽음이거나 노동자의 분신, 장애인 포장마차 주인의 자살, 용산철거민의 설움에 따라 붙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말이 아니다. 이 사회의 모든 것을 다 취했고 대통령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으며 경제적으로는 전혀 어려움없는, 존경과 시기를 한꺼번에 받는 저명한 분의 자살에 붙여지는 무조건적인 이해와 용납의(?) 형용사라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뭔가 어수선하다. 괜히 찝찝하다.
질문
누가 나에게 물었다. “왜 대통령이 인간적이어야 하지요?”
질문의 요지는, 대통령은 국민앞에 선서한 그대로 대통령의 책무를 다하면 되고 그분 개인의 인간적인 면모가 모든 공과를 대신할 수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냥 생각없이
“인간적이면 좋지, 뭐...” 했다.
따뜻한 진보
따뜻하니까 진보하는 것이다. 뜨거우니까 진보신당하는 것이다. 당연하지. 그럼에도 따뜻한 진보를 하자고 말하는 분들... 무제한적인 관용이 따뜻한 것이라는 뜻일까? 내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면 차갑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
자유
자유는 타인을 위해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지만,
내가 법을 어기지 않았음에도 법을 지킬 것을 강요받는다면, 무단횡단을 하지 않았는데도 교통법규준수를 위해서 8시간의 안전교육을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면 부당하다.
나는 애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간동안 술마시고 떠들지도 않았고 함부로 지껄이지도 않았으며, 망자를 심하게 힐난하지도 않았다. 전국민을 애도분위기로 몰아가는 방송에 대해서도 불편하기는 했지만 불평하지 않았고, 그런 군중심리가 나름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애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가락질하면 그것은 내가 아닌 손가락질하는 자의 부자유다.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평소에는 저주에 가까운 욕을 퍼부었는데 저리도 허무하게 죽다니... 후회막급이라면서 봉하마을에 다녀 온 사람들이 많다. 전대통령의 퇴임식을 보면서 시원섭섭하다고 하더니... 영결식에 가자고 보채는 사람들이 많았다. 참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다. 나 역시 마음약하고 선한 줄 알았으나 이번 경우, 좋은 사람들에 훨씬 못미치는 편협함과 소심함의 소유자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가? 좋은 사람들, 인정이 넘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 샘샘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어떤 현상에 대해서 누구나 같을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감동적일 수도 없다. 이해해 달라.
진보를 찾아서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라는 이 영화 야하다. 지금 기준으로는 별로겠지만 당시에는 야한 소설이었고 야한 영화였다. 나는 이 영화를 봤지만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다. 리차드 기어를 알게 되었고 몇가지 야한 장면들로 인해 잠을 몇 번인가 설쳤다는 것 그뿐이다.
한참 지난 다음,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보니 야한 영화가 아니라 여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영화였다. 비록,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와중에 미숙하고 감정에 치우쳐서 실수와 아픔을 경험하지만.
왜 지금 이 영화가 생각날까? 제목 때문이다. 전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진보는, 진보신당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진짜 진보를 찾아 거리를 헤메야 하는 시간들이 더 길어질 것 같고... 정체성을 찾는 날 까지 그 고난과 궁핍, 역경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
그러나 그까짓 것, 99명의 지지자를 잃어도 이 사회 단 1%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 악물고 앞으로 갈 수 밖에... 이게 척박한 진보의 현실이겠고, 보람일 것이다. 진보는 이 사회의 반이 아니라 험한 세상의 다리다.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2009년 현재로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