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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7 00:52

김길오 선생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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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당의 민주적 운영 침해 및 강령 위배 등 해당 행위'가 벌어진 사실이 폭로되었을 때 필자가 저에게 '언더'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해서 받은 글입니다.


우선 오랜 시간 고민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썼을 필자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긴 글입니다만 필자가 끊어서 올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서 한 번에 올립니다.


그리고 필자는 반성의 기회가 되고 당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썼으므로 

분쟁의 소지가 되거나  가십거리로 전락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점을 양해 바라며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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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오 선생님께.

 

제가 선생님의 비서로 1년 동안 있다가 현장으로 복귀할 때 이런 말씀을 하셨죠. “앞으로 볼 일이 거의 없으니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지를 써라. 그 편지를 쓰다보면 저절로 답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이죠. 그래서 처음으로 선생님께 편지를 써봅니다. 말씀하신 대로 어떤 해결 지점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죠.

 

21일 알바노조 이가현 씨를 비롯하여 다수의 조합원이 알바노조, 청년좌파, 평화캠프, 노동당 등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언더조직의 존재와 그 속에 있었던 일을 폭로한 일이 있었습니다.

 

혁명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혁명가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조직에서 발생한 일들을 폭로한 글을 모두 찾아 놓고 다 읽지 못했습니다. 글을 찬찬히 읽기도 전에 처음 나온 혼전순결, 낙태금지라는 말에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해자인 박정훈에게 바로 전화를 해서 흥분해서 말을 했습니다.

 

도대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누가 저런 주장을 한단 말이냐? 그게 사실이냐? 그걸 사람들에게 읽혔다고? 그게 도대체 무슨 문건이냐? 그리고 네가 읽혔냐?”등을 물었습니다.

 

몇 차례 통화 뒤에 확인된 것은 1997년 대선 뒤에 나왔던 전국학생연대의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향하여라는 팸플릿의 원본격인 초심이라는 제목의 글이라고 했습니다. ‘혁명적 학생운동가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나온 팸플릿이 전학련에서 유통한 대중판이라고 하면 초심이라는 제목의 글은 언더 조직원들에게 따로 교육되는 내부용 문서였습니다. 그리고 안승천 씨가 쓴 세상을 뒤엎어라도 읽혔던 모양입니다.

 

초심이라는 문건은 제가 학생운동을 할 때 읽었던 적이 있는 문서였습니다. 그때도 문건의 내용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할 때라는 제목으로 콘돔 사용법 등을 알려주는 문서가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혼전순결을 이야기하고 한번은 콘돔 사용법을 알려주는 문서가 나와서 저는 이와 관련한 조직의 입장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조직원이나 학생운동가의 권장도서였던 세상을 뒤엎어라.’라는 책에서 이야기하는 혼전순결,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 등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안승천 씨에게 직접 성적 자기 결정권을 위배하는 하는 것이라고들 비판했었습니다. 당시에도 비판이 많았던 글을 언더조직에서 조직원들을 교육할 때 자인공과 함께 읽히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20년 전 글이 지금까지 읽힌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교조주의란 이럴 때 쓰는 말 인거 같습니다. 한심하다는 표현밖에 쓸 수 없었고 절망감이 함께 했습니다. 그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당했을 사람들과 자신의 문제제기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무력함에 힘들어 했을 사람들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표현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통과 억압이 된다는 사실을 알 리 모르는 자들에게 깊은 슬픔이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저런 문서를 혁명가를 양성하는 조직에서 읽힌다는 것은 그 교육 책임자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더조직은 지역이든 세대든 부분 책임자가 운영을 혼자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또한 30대 정도의 청년학생 조직 책임자가 오래된 문서를 어떤 경로로 구할 수 있었을까요? 그건 그에게 원본을 전해준 사람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아마도 소위 말하는 더 윗선이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그 문서에서 담고 있는 내용이 그 조직에서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덕목으로 조직원들에게 읽히는 승인된 문서라는 말입니다. 일종의 커리큘럼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제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바 소위 말하는 그 언더조직의 수장이 김길오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제가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당신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했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선생님께 교육받았던 그 조직의 원칙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해보려는 이유는 제가 헌신해 왔던 운동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모든 활동을 다 돌아볼 수는 없지만 이 편지에서는 혁명가가 갖춰야 하는 룰에 대해서 말하고 돌아보고자 합니다. 그 원칙을 가지고 대중운동을 하면서 괜찮은 사람들을 선별해서 조직원으로 만드는 시스템에 복무했던 사람으로서 저의 오만과 오류, 그리고 반성과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저는 조직운동을 떠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학생운동 이후 노동조합 상근자를 하다가 갑자기 차출되어서 일주일 만에 짐을 싸고 2002년 선생님의 비서로 들어가서 맺게 된 조직운동을 2012년까지 했습니다. 그 전에도 학생운동시절에는 학생운동 책임자 아래, 이전을 하고는 지역 책임자의 관리 아래 조직운동을 했지만, 이 조직에서 진정한 조직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최종적으로 형님을 만나는 것으로 결정이 납니다. 그래서 저는 비서라는 임무로 인해서 다른 조직원들이 형님을 만나는 순간 보다 훨씬 더 빨리 뵙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2012년에 조직 활동을 그만두겠다고 보고했고, 2013년 고 권문석 장례식에서 선생님을 만나서 왜 제가 그만두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조직 활동을 그만둔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책임자와 소통을 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선생님과 소통이 가능했고 정서적으로는 선생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완전히 마음을 접게 된 것은 2015년으로 기억하는 선생님과의 마지막 통화 이후였습니다. 이것이 짧은 저의 조직운동의 시간입니다. 이제는 그 속에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조직의 의미

 

언더, , 조직, 우리운동등 서로가 부르는 호칭이 다릅니다. 이유는 이 조직은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향은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조선공산당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조직이었습니다.

 

공산당 창건 이후에만 진정한 계급 전쟁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혁명사가 곧 당사이고, 당사가 곧 혁명사인 진정한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된다. 공산당이 없는 상황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취하는 모습은 오직 공산당 창건뿐이다.”

 

우리의 목표는 당 재건이었습니다.

 

조직은 당을 재건하고 혁명을 완수하는 혁명가 조직으로 결사했고, 선생님은 스스로를 혁명가라 했습니다. 12살 때부터 혁명가가 될 것을 결심한 사람이었고 한국에서 고문을 이겨내고 조직의 비밀을 지켜낸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엄격한 비밀엄수, 조직원의 까다로운 선발, 직업적 혁명가를 준비하는 조직에서는 지켜야 하는 여러 가지 원칙들이 있었습니다.

 

이 원칙들은 제가 2002년부터 2003년 동안 선생님의 비서로 있으면서 배웠던 것들입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왜곡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만 강력한 혁명조직의 조직원이라면 지켜야 하는 룰을 왜곡해서 기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 ‘형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이유

 

이 조직에서 형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이유는 조직에서 선생님의 역할이 가문의 장자처럼 조직의 장자이고 혁명의 책임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조직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가문을 만드는 형태로 구성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장자는 가문에서 웬만한 어른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지위이면서도 아우들을 돌보는 역할이므로 가장 한국적인 혁명조직에 맞는 형태라고도 했습니다. 많은 여성 조직원들이 왜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냐고 물었지만 여자가 여자에게도 형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에 호칭을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존재조차도 모르는 존재를 자주 보는 사람,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도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사람을 자주 보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오해가 많다는 이유였습니다. 의도적으로 거리감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3. 여성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는 문제

 

처음 조직을 만들 때 여성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여성은 혁명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반국가단체의 수괴는 사형이고 그 조직원들은 최소 무기징역이다. 증거를 찾기 위해 고문이 따를 텐데 여성에게는 성고문도 불사할 것인데 그것을 여성이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 고 박종철 열사의 팸 선배입니다. 과거 80년대 학생운동에서 고문을 하는 이유는 국가정보원이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사람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이후에 뭔가를 다시는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고 했습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고문이 시작되기 전에 조직도를 다 불게 되고, 선생님이 고문을 당할 때 앞에 놓인, 현재의 유명한 정치인들의 반성문도 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대중공간에서 활동하게 되면 사람들이 무척 놀랄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물론 선생님이 대중 공간에서 활동한 후, 선생님이 그렇게 조롱했던, 반성문을 제출했다는 사람들이 선생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놀랐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뛰어난 여성 활동가를 만나게 되면서 선생님의 생각이 바뀌게 되면서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이런 생각은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남성 조직원을 보조하는 역할로만 여성 조직원을 바라보거나 명예 남성이 되어 버린 여성 조직원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런 명예 남성들은 남자들은 좋겠어요. 형님이랑 같이 잘 수 있어서요.”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고문을 이겨낸, 유명한 정치인들이 놀랄 만한 선생님의 눈에 들고자 했습니다.

 

선생님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 같은 활동을 하더라도 저평가 받기 때문에 남자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뛰어난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성차별적인 상황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가는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런 현실을 뛰어 넘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당시 선생님이 생각하는 여성 정치인의 모델은 박근혜였습니다.

 

여성 정치인은 연애 스캔들 같은 것 없이 평생 비혼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여성 활동가를 일반 사람으로 보게 되고, 가부장적인 현실에서 정치인으로 살아남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많은 여성 운동가들이 혼인 때문에 결국은 평범함 여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비서로 있는 동안 매일 바둑을 배웠습니다. 여자들이 바둑을 두는 것은 흔치 않는 일이고 그런 것을 잘하는 여자를 남자들은 쉽게 보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남성 노동자들은 보통 여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는 여성 활동가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남성성을 우위에 두고 있는 선생님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선생님은 제가 동지들에게 술을 따르는 모습을 보고 창녀같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따르는 술을 받았던 사람도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 중 아무도 그 표현에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저를 따로 불러서 왜 그렇게 센 표현을 썼는지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여성 활동가는 술자리를 주도하거나 술을 잘 따르거나 하면 남자들이 낮게 본다. 그래서 절대 그러지 말라는 의미로 세게 말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표현은 정말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도 전 웬만해서 남의 잔에 술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를 잊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거 같았는지 16년이 지난 얼마 전에서야 창녀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봉인하지 않았으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기에 기억에서 삭제했던 것 같습니다.

 

 

4. 혼전 순결

 

이것은 조직의 준엄한 룰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혼전 순결을 강조했습니다. 혼전순결을 강조한 배경에는 아마도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어쩔 수 없는 낙태, 책임지지 않는 남성, 그리고 여성이 떠안게 되는 다양한 신체적, 정신적 상처에 대한 우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선생님의 방식은 혼전 순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여성과 남성이 차이가 컸습니다. 이번에 알바노조에서 혼전순결, 낙태금지라는 문서가 회람되었다고 폭로되었을 때 “20년 전에도 저런 이야기 안했다!”라고 한 조직원이 있어서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저렇게 말한 분의 부인이 저랑 잠시 같은 공간에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연애 중이던 그 두 사람은 놀러 갔다가 (혼전순결의 룰을 지키지 않고) 잠을 자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고민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형님에게 보고를 해야 하냐고 저에게 물어왔습니다. 아마 그 남자 분은 그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냥 혼숙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대중 공간에서 많은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고 그 이후 혼숙은 물론 혼숙을 방조한 행위조차 처벌하겠다는 지침을 내려진 이후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혼전 순결을 말했는데 조직원이 그 규칙을 어길 수 있다고 상상조차 못했으니깐 말입니다.

 

혼전 순결이 왜 여성에게는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고민이 되는 문제이고, 남자들에게는 그냥 권장 사항정도로 여겨졌을까요? 남성인 선생님과 남성 조직원은 그 룰이 어떤 억압을 만들어 내는지 이해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혼전 순결이 원칙이었다는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저는 성폭력 생존자입니다. 이런 단어는 조직에서 배운 단어가 아닙니다. 선생님을 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성폭력 생존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비서가 된 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 한 번 더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예전에 들었지만 충분한 신뢰관계가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자네에게 더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동안 이야기 하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저에 대한 애정과 배려라는 건 감사히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저는 제가 당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성폭력 사건 이후 연애를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치료과정도 거치고 이해해주는 사람도 만나서 사랑도 했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자네는 이제부터 조직의 이름으로 처녀야!”라고 했습니다.

 

몇 번의 성폭력 피해자 프로그램도 받아 보고, 반성폭력 교육들도 받아봤지만 피해자를 위로하고 지지하는 방식으로 처녀성을 부여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 처녀성을 잃었다는 것이 여성에게 주는 압박을 해결하는 방식을 조직의 이름으로 처녀성을 회복해 주면 된다고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직에서 처녀성을 부여받는 것에 대해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이유는 내가 혼전순결이라는 룰을 위반한 존재 자체가 아니게 되는 안도감 때문이었습니다. 룰을 어기는 것은 조직원에서 아웃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사형선고이니까요.

 

 

5. 게이 불허

 

투명한 인간관계를 강조하는 조직에서 교육받은 저는 어느 날 나의 일생을 투명하게 이야기하던 중에 제가 알고 있던 동성애자 조직원을 아웃팅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무척 화를 내시면서 그 사람은 바로 조직에서 아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인 지역 책임자들은 이제부터 줄줄이 다 징계를 받을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당황했습니다. 동성애자가 혁명조직의 조직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납득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인데 왜 동성애자는 조직원이 될 수 없냐고 물었습니다. 답은 이랬습니다. 비밀조직에서 그들은 튀기 때문이다. 잘 보면 그들은 행동들이 튀는 사람들이고 사람들이 주목하게 되면 비밀이 탄로 날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선생님이 동성애자에 대해서 이해하는 바가 낮다고 생각해서 몇 차례 이야기를 더 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억압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완벽한 이성애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저는 선생님께 남자를 좋아해 본 적은 없냐고까지 물어봤습니다. 물론 답은 전혀 없다.”였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살이 닿는 거 자체가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레즈비언인 어떤 조직원을 저에게 아웃팅까지 하면서 그 조직원이 자신은 남자의 살갗이 닿으면 소름이 끼친다고 했던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즈비언은 조직원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레즈비언은 되는데 게이는 안 된다는 것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여서(형님을 만나는 데는 순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알 것 같고 발언권이 있을 것 같은 선배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 선배 정도면 선생님을 설득할 수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문제 제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선배의 답은 이랬습니다. “그건 아마 형님의 취향일 거야.” 라고 말이죠.

 

그 때 저나 선생님이나 아웃팅을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인식은 없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나 때문에 그 사람이 조직에서 아웃된다는 사실과 지역 책임자들이 징계를 받게 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조직운동이 곧 운동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시절이기에 조직에서 짤린다는 것은 곧 운동가의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웃팅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직이라는 특수 관계 속에서는 그 사람의 인격과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보다 투명한 인간관계랍시고 상대의 동의 없이 모든 정보를 말하고 평가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습니다.

 

얼마 전 언더조직 사태가 터지고 나서 룰에 대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확인을 해 봤습니다. 실제 제가 있는 지역에서 조직 내에서 커밍아웃을 한 사람이 있었고 이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당시 지역 책임자는 형님의 조직원으로 받을 수 없으니 제가 지역 조직원으로 받죠.”라고 정리했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그런 사람은 조직원이 될 수 없다는 선생님의 말을 들은 몇 년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중간 책임자급들은 이것이 조직의 룰이라는 것을 인지했고 여전히 게이 금지라는 룰은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저는 그 당사자에게 제가 그때 아웃팅한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늦은 사과를 했습니다. 그날 그 사람이 저에게 받은 상처와 충격에 실망하고 슬퍼하던 얼굴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저의 사과를 받아줘서 고맙습니다.

 


6. 이혼 금지

 

배우자의 외도 및 폭력을 제외하고는 이혼은 불가하다.

 

이것이 각인된 이유는 제가 속한 지역의 선배가 조직의 승인 없이 이혼을 한 일을 선생님을 찾아가 고백을 했던 일이 있었다고 선생님이 저에게 들려 줬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선생님은 이런 표현을 쓰셨죠 그 선배가 목 빼고 (선생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말이죠사람에 대해서 무한 책임을 지는 조직이기 때문에 이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음을 그 선배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직의 룰이 이혼 금지인데 그것을 어긴 사람은 당연히 조직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불쌍해서 그냥 한번 넘어가 줬다로 정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어 강조한 룰은 이러했습니다.

 

동지들에게 청첩장 다 돌리고 정식적으로 혼인하는 것 아니면 결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동거 따위는 없다.”라고요.

 

 

7. 낙태금지

 

이것은 선생님의 룰이 아니었습니다. 낙태에 대한 입장을 물었을 때 자신은 입장이 없다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8. 재정독립- 혁명가라면 자본가가 되어야 한다.

 

혁명가라면 당연히 자신의 활동비와 재정을 책임 질 수 있는 부위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자본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본주의를 뒤엎어야 하는 데 자본가가 되라니 무슨 말인가라고 처음에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운동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고 돈이 돈을 만들어 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2003년 선생님의 말에 따라 비서를 끝내고 오픈하자마자 식당을 차렸습니다. 선생님은 비서 프로그램을 하던 모든 비서들에게 이런 식으로 식당을 차리게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식당부터 해서 점차 큰 사업을 성공시키면서 조직의 재정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48시간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식당 일을 배우고 개업을 준비하고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만나서 조직해야 일을 맡고 재주껏 했었지만 결국에는 신용불량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라면 잘할 줄 알았다.”

 

그때 저는 화가 나기보다 미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조직이 나에게 부여한 임무 중 하나인데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식당을 한 지 일 년 동안 진 빚 4500만 원을 5년 동안 갚았습니다. 빚을 갚는 데 전념하라고 저에게 주어진 휴식시간이 지나고 다시 조직 활동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저에 대한 심사는 냉혹했습니다.

 

빚을 갚아야 했고 집안의 생활비도 해결해야 하는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났지만, 저는 생계를 포기 하고 전업적인 활동가를 하겠다는 말을 못했습니다. 심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나름 성과를 인정받고 싶어서 돈도 벌면서 이 정도 하고 있다고 보고했을 때 지역 책임자는 냉소로 답했습니다. “돈도 벌면서 그렇게 잘하는데 전업 활동가가 되면 얼마나 잘하겠어?”라고 말이죠.

 

저는 월 20만원의 상근비를 받으면서 버틴 선배들처럼 활동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전업적으로 활동하는 선배들보다 돈을 비교적 많이 벌기 시작하면서 생각과 생활이 바뀐 저에 대한 위축감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늘 미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지들을 만나면 맛있는 것을 사주고 돈을 많이 썼습니다. 책임자가 저보고 돈을 많이 쓴다고 문제제기를 했을 때 또 미안함이 생겼습니다.

 

최근에서야 알게 된 활동비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알바노조 조합원들이 휴식과 생활비까지 받았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왜 줬냐고 물어봤을 때 조직에서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냐는 마음으로 줬다는 이야기를 건너서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운동가를 이런 시혜적인 입장으로 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학생운동을 할 때부터 각종 선거 때 마다 돈을 모아오라고 이야기를 하고 많이 모으지 못하면 혼내던 사람들이 구해온 돈이 결국은 조직의 돈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고 나서 저는 화가 많이 났습니다.

 

후배들에게는 재정을 독립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정작 자신은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이 가능했는지를 얼마 전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활동비와 생활비를 받는 사람의 기준은 아마도 선생님이 정하시는 것이겠죠. 저는 대중운동 공간으로 복귀 하면서 선생님에게 활동비로 200만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빚을 갚을 때에도 조직에서 마음이 멀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매월 일정한 회비를 냈고 선거 시기마다 보투를 했습니다.

 

사람마다 잘하는 것이 다르고 활동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돈을 벌고 누군가는 대중 활동을 하고 누군가는 이론가로서 존재하는 것이겠죠. 스스로 활동비도 만들 수 있고 여러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지만 그런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원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돈을 받는 사람들이 돈을 주는 사람에게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선생님은 삼성이 다른 회사에 비해서 1.5배의 돈을 주고 2.5배의 일을 시키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더 좋아한다면서, 그래서 자신의 사업체로 그렇게 운영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돈이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지애로 자금을 지원했다고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돈을 받지 않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감당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지원한 돈이 대기업 차장급 월급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누군가에게 얼마를 지원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돈을 번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혁명가라면 재정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룰을 지키기 위해서이고 책임자급은 자신의 재정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못하고 책임자라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선생님의 돈을 받으면서 조직원들을 뒤에서 지시나 하고 조직원들의 활동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기만적인 모습에 헛웃음이 났습니다.



9. 조직의 룰이란 


선생님께서 저에게 룰을 가르쳐 주신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혁명가라면 운동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 조직의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사람,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다양함일 것입니다.

 

지금의 높아진 눈높이로 그것을 평가해 본다면 어이없는 룰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저 룰들이 폐기 된 적이 있었나요?

 

이런 룰에 대해서 비판한 사람이 없었냐고 물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비판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비판은 수용되지 않았고 그 사람들은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라들은 그런 비판자들이 사라진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무능력함을 조롱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 중에 책임자라는 지위를 맡아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분들의 사과와 반성을 찾아보기는 힘들었습니다. 때론 떠나온 조직에 대한 비판과 비난의 방식은 저열하고 치졸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비서로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저 조직은 몸까지 대 주는 조직이지. 몸 대어 줬을 걸이라고 이야기했다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저에게 사과를 했습니만.

 

저는 최초 발화자인 사람에게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해서 직접 통화도 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기억은 안 나지만 그렇다고 하니깐 미안합니다라는 익숙한 레파토리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가해자가 망신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뒤 선생님은 저에게 전화를 하셨죠. 선생님의 그 첫 마디를 듣고 저는 조직에 대한 약간의 미안한 마음까지도 접게 되었습니다.

 

자네 미쳤어?”가 첫 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페이스북 친구가 아닙니다. 그 글을 보고 누군가가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전했겠지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괜찮아요?”라는 말이 먼저이지 않았을까요? 그런 말조차 없이 조직의 비밀을 폭로한 사람처럼 취급하고 그 일을 조직의 수장에게 보고하는 것이 먼저인 조직원들의 충성 방식은 저에게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지키고 싶었던 무엇이 있었나요?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선생님의 룰에 변화도 있더군요. 비서로 지낸 시간을 보내고 몇 년 뒤 다시 뵈었을 때 선생님께서 어떤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며 동거부터 해보는 것이 어떠하겠냐는 제안을 하셨을 때 저는 놀랐습니다. 동거 금지라고 저에게 교육을 했는데 동거부터 해보고 살 만하다 싶으면 결혼을 해보는 거지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만든 룰인데 언제 룰이 이렇게 바뀌었는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몇 차례 말씀드린바 대로 목숨을 건 혁명조직에서 수장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조직이, 그리고 언제 그 수장을 다시 만날지 모르는 채 헤어지고 각 지역과 영역에서 프락션을 하는 조직에서 룰이 수장의 기분에 따라서 바뀐다면 그것을 혁명조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묻고 싶습니다.

 

조직에서 징계를 받는 사람들은 보통 노동형에 처해집니다. 대부분 그 과정에서 이탈을 하지요. 5년 노동형을 받고 돌아온 조직원을 본 적이 있습니다. 노동형이라는 것은 일을 하면서 벌고 있는 임금의 일부를 조직에 헌납하는 형식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룰을 지키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5년 혹은 10년 징계를 받고 돌아왔을 때 혁명조직이라 자처하던 조직의 룰이 바뀌면 그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뭐가 됩니까? 이런 식으로 바뀌는 룰을 지키는 사람이 스스로 혁명가라고 자처하면서 사람들을 조직하고 있다면 이제 사기 그만 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친 것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정당운동으로 오픈할 때도 조직원들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오픈을 하지만 관계는 그대로 유지된다고 말이죠. 그래서 이 조직은 해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조직은 박정훈의 말처럼 구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사권과 재정의 최종승인권자가 따로 존재하는 방식은 여전히 작동되었던 것입니다. 조직을 구성도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번 사태를 바라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이미 그만둔 운동이지만 제가 그 일부였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조직을 구성 할 때부터 가부장적인 형태를 지향하고, 여성과 장애인,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조직운동을 혁명운동이라 착각하고 그 권위를 제가 승인했던 것입니다.

 

권위는 누가 홀로 부린다고 작동하는 건 아닙니다. 그것을 승인하는 사람들이 함께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 권위를 인정하고 승인했던 사람입니다. 또한 어떤 순간에는 그 재생산 구조에 복무하면서 사람들에게 위계적인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진보신당과 통합 이후 전국적으로 대의원을 어떻게 장악할 것인가를 계획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중운동 공간에서 승인 받지 못한 사람이 좌장이 되어서 대중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을 시쳇말로 비선이라고 합니다.

 

김순자 대선 후보와 관련해서 전국위원회 전에 모여서 전국위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 했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그 논의에서 김순자 씨에게 사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해도 됩니까?”라고 말하라고 하셨던 것도, 이런 대선 기획에 의구심을 가진 진보신당 당원에게 출마를 안 하면 김순자 씨가 죽을 거 같았다고 그래서 대선을 치르게 되었다고 말했다는 것도 기억이 납니다.

 

사회당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평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닌데 어떤 제안서나 입장문이 그 사람 이름으로 올라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건 모두 소위 말하는 언더에서 올라온 글입니다. 선생님이 사회당에 보낸 어떤 글 중 간난한을 사회당에서 가난한으로 고쳤다고 해서 사람들이 간난신고라는 사자성어를 모른다고 한자 공부 좀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비선이 작동하는 구조의 일부로 있었습니다.

제가 노동당에서 의결권을 가졌던 대의원, 전국위원이었을 때 조직의 지침에 따라서 행동했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에게 의결권을 주셨던 당원분들에게 사과드립니다.

 

저는 대중운동을 할 때 여성주의, 장애인, 성소수자와 관련된 발언권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조직원 선발을 할 때 결국은 반여성주의, 반장애인주의, 반성소수자주의에 기반 할 터인데, 이중인격자가 아니고서는 저는 그렇게 연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걸 꾸준히 해 내시는 분들의 이중성에 감탄이 나오기도 합니다.

 

저 역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약한 자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입니다. 하지만 어떤 지점을 넘어선 여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고, 그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남성 우위 세상을 힘으로 넘어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장애인은 비밀조직의 특성상 궁극적으로는 우리조직원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차별을 했냐고 물으면 차별적인 대우를 한 적은 없을 것입니다만, 사람을 등급을 나누는 시선 자체가 차별이 아니었을까요? 조직을 군대에 비교해서 장애인들은 군대를 가지 못하는 것처럼 이 조직도 그런 조직이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어렸을 때 물에 빠진 적이 있어서 생존과 관련된 수영은 절대 안 배울 거라는 중간 책임자와 운전면허는 귀찮아서 안 딸 거라는 사람에게는 혁명조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거나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남자였습니다. 수영과 운전면허는 일종의 조직원이 되는 기본 조건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룰이 작동하게 되는 근간은 징계가 아니었습니다. 이러이러한 것을 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조직하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은 그런 기준에 맞춰진 완성된 사람처럼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룰이 유효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혁명조직을 자처하면서 지역 혹은 부분 책임자들이 자신들은 형님을 통해서 승인된 사람들이고, 그렇게 때문에 그 권위를 업고 자신이 관리하는 조직원들에게 지침을 공유하고 조직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상명하복을 강조하고, 성과를 쉼 없이 완수하도록 강요하며 조직원의 활동에 대해서 책임자가 주관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10. 반성과 사과


대중운동 공간에는 얼굴을 드러내어 놓지는 않지만 대중 운동가들을 지도하는 사람. 자신은 누군가에 의해서 승인된 사람이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하다고 생각 하는 사람. 혁명조직과 대중운동 조직은 다르기 때문에 대중운동 공간속에서는 여성주의를 말하고, 장애인운동을 말하고, 소수자 운동을 말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나는 당신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스스로 급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람들을 대상화하고 등급화 해서 사고하는 사람.

 

그건 저였습니다. 그리고 그 조직원 누구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여성주의, 장애인운동, 성소수자 운동이 진짜일 리 있겠습니까?

 

그런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대중운동을 만들지만 그 속에서 핵심 조직원들을 양성해 내는 것만이 목표입니다. 결국 조직원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조직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운동에 복무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저는 조직에게 기획과 판단을 맡긴 채 행동대장으로 뛰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조차 납득되지 않아서 남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이 내려져도 비판을 하기 보다는 실행을 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뭔가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는 정신승리를 하면서 실행을 했습니다. 참으로 주체적이지 못하고 안일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계를 포기 하지 못해서 전업 활동가가 되지 못하는 저의 역할을 바꿀 때 지역 책임자가 이제부터는 너도 너의 운동을 하렴.”이라고 했을 때 저는 멍해졌습니다. 나의 운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선생님은 자네의 운동이라는 것이 뭐가 있느냐? 지금까지 내가 시키는 대로 했고 그것이 자네의 운동이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조직원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선이었습니다.

 

혁명이라는 대의로 사람을 조직했지만 결국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기도 사람이 모이는 곳인지라 이 조직 내에서도 나름 정치를 잘하는 사람들이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조직에 헌신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해온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이 조직을 활용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야 필요한 자금이 나오고 사람이 지원되기 때문입니다.

 

학생, 청년조직에서 혁명운동 조직원이 되고 나서는 선생님과 그 옆에 있는 책임자들에 의해서 지역과 부문으로 박히는 구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금. 혁명에 취한 사람들은 그것이 대중운동의 질서를 왜곡했다는 것을 인지, 인정하지 못합니다. 안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잘 수긍하지 못합니다.

 

왜나면 스스로 자본주의를 뒤엎고 대중운동을 장악하는 혁명조직은 대중운동의 룰 따위로 평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조선공산당을 잇는 혁명조직인지, 그리고 결국은 자본주의를 뒤집어엎은 조직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혁명이라는 건 무척 사후적인 평가방식이니까요.

 

그걸 미리 당겨 와서 자부한 사람들이 조직원을 체스 판의 말처럼 쓰면서 결국 하는 것은 대중운동을 장악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도 그런 존재로 취급받아서는 안 됩니다. 저도 무척 늦게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반성을 하고 제가 가진 오류들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정파라면 정치적인 지향이라도 분명할 것입니다. 정파를 뛰어넘는 조직이라고 하면서도 어떤 명확한 정치 노선과 이념을 설파하지도 못하면서 전인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만이 남아 있는 조직의 이름은 혁명조직이 아니라 김길오 조직이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수령조직입니다.

 

그리고 그 조직과 조직원들은 자신들이 왜곡시키고 기만한 대중운동공간에 사실을 말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여전히 자신들은 선별된 다른 사람들이고, 대중운동의 룰에는 적용될 수 없는 조직이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착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이번 사태도 조직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을 조직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평가하지 말길 바랍니다. 2002년 출마자 동지회 사태로 조직이 붕괴되었을 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잘못된 기획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냐고 했을 때 선생님은 전혀! 내가 잘못한 것은 조직원의 수준을 너무 높게 봤다는 거지!”였습니다. 그 수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만약 그 수준이라는 것이 제가 배웠던 가부장제로 점철된 남성성을 체현하는 것이라면 시대착오적인 것이며, 실제로는 여성들을 억압하기만 한 원칙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즉시 사과 하라고 저에게 가르쳐주셨지요.

 

저의 반성과 사과는 지금도 늦었고, 여전히 부족합니다. 정리해 나가는 과정이 저에게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일이 쉬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혁명은 고사하고 최소한 시민권이라도 획득할 수 있으려면 잘못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죄를 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처럼 즉시말입니다.

 

 

 

ps.

 

1. 함께 조직운동을 했던 분들에게

 

형님에게 승인받은 여성주의 운동을 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본다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감옥에 가거나 하면 리비도 조절을 해야 하는 것은 필수이므로 자신은 그런 것이 완벽하게 조절이 가능하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형님과 자는 것이 어떤 혜택이라고 여기는 여자들이 많아서인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 형님이 좋아할 거라는 것을 알아서 인지 그런 식의 말을 많이 들은 형님은 (그런 말을 스스로 다른 조직원들에게 많이 했습니다. ) 저와 다른 비서와 함께 혼숙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신체를 맞대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머리를 서로 맞대는 방식으로 잠들기 전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자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두 번 혼숙을 했습니다. 제가 현장으로 복귀하기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낯선 사람이 있으면 잠을 잘 자지 못하기 때문에 그 두 번이 무척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저는 잠들지 못해서 힘들었을 뿐이었습니다.

 

혼숙은 물론 혼숙을 방조하는 행위까지 처벌하겠다는 지침을 내리는 조직의 수장은 모든 룰에서 자신은 예외였습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서야 이런 레퍼토리가 많은 가해자들이 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 역시도 대중운동공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니 그 조직의 룰에 따라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잘못된 일이었다고 이야기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저 또 조용히 형님에게 보고 하실 건가요?

 

그리고 게이 금지를 형님의 취향일 거라고 이야기 하신 분이 자신인지 아닌지 혹시 확인이 필요하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당신이 지은 웃음이 어떠했는지, 그 웃음에 제가 어떤 절망을 느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2. 이 글을 읽으시는 노동당 당원 여러분께

 

먼저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아직까지도 제가 정리해 나가는 중이어서 모든 것을 밝히고 사과를 구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듯합니다. 저는 얼마 전 탈당을 했습니다. 98년도 청년진보당부터 단 한 번도 진보정당의 당원이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탈당의 이유는 이번 사태에 대한 실망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거리감을 두고 반성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시간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내용이 어떤 뒷담화나 가쉽거리로 소비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앞으로 당 내에서 이런 문제들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은 토론과 방식이 제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는 고백과 폭로의 방식으로 사과와 용서를 구하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 최초의 동지이자 선배로서 박정훈에게.

 

처음 동지의 손을 잡았을 때 무척 차가웠던 기억이 납니다.

조직운동을 최초로 제안했던 사람으로서 제가 가지는 책임감이 있습니다. 이번 일이 일어나고 이런 일의 책임은 관여한 모든 사람이 져야 하는데, 침묵하고 있는 선배들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라서 의도치 않게 개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생운동에서 일어난 일인데 우리가 왜 책임을 져야 하냐는 식의 무책임한 말과 모르는 척 하는 사람들, 그리고 침묵이 방법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 분노했습니다. 동지 역시 그 시스템에 함께 했기에 져야 하는 책임이 많을 것입니다. 동지의 글을 보면서 내부적으로 바꾸어 보려고 했던 노력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서로의 선택은 다르겠지만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방식을 많이 생각해 봅시다. 동지의 말처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로 책임을 져야겠지요. 다시 손을 잡게 되었을 때는 동지의 손이 좀 따뜻했으면 합니다.

 

 

3. 서상영 선배에게.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잘못을 했지만, 우리가 했던 운동의 중심에 섰던 선배가 보여준 용기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했던 학생운동 시절에 이뤘던 자부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많은 후배들이 선배의 반성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4. 문성호에게.

 

98년 청년진보당 창당과 전학협 건설을 위한 희망을 함께 했고 그때 나의 마니또였던 당신의 글을 읽으며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 몰래 나에게 전해준 생일 선물이 떠오릅니다. KYPP라고 새겨진 티셔츠였습니다. 지나고 보면 오류투성이고 반성을 해야 할 것이 많지만, 그때의 열정과 노력들은 꼭 기억하길 바랍니다.

 

 

부산에서 이민정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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