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난 그리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총선 전 창당은 자주파와 단절한 진보신당이 국민적 호응을 얻으리라는 허황된 꿈이 아니라, 앞으로 몇 년은 끌어가야할 민주노동당과의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절박한 생존의 요구에서 비롯된 구호이다.
민노당과의 싸움에서 진보신당은 결코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다. 적어도 8년동안 국민들에게 각인된 민주노동당의 이름이 있고, 여전히 민노당에 남은 수만명의 당원이 있으며, 지역조직과 대중조직 기반도 저쪽에 더 많이 남아있다. 진보신당은 노,심으로 대표되는 인물과, 구민노당 정책위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던 브레인을 가지고 있지만, 창당과 총선을 동시에 치러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 역량을 제대로 펼치기 힘든 상황이다.
ksoi의 여론조사에서는 민노당 지지층과 일반국민들 사이에서 민노당보다 진보신당에 대한 지지도가 두 배 높게 나타났으나, 이것이 그대로 총선결과로 나타나리라는 낙관은 금물이다. 여기에서의 진보신당은 2000년 총선을 앞둔 여론조사에서 20%대의 지지를 받았던, 실제로 존재하기 이전의 상상속의 '진보정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보신당은 이름을 알릴 시간도 부족하고, 지역구 후보도 민노당보다 적을 것이다. 정당득표에서 민노당을 앞선다는 보장이 없다.
신당은 불리한 여건에서 생존투쟁을 벌여야 한다. 선의의 경쟁이나 지역구조정 따위를 이야기할 여유가 없다. 민노당도 지금은 지역구 조정을 이야기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보진영의 재통합'을 원하는 이들의 의견일 뿐, 본격적으로 선거전에 돌입하면 분위기는 달라질 것이다. 지역구 후보가 없는 지역에선 정당득표율이 안 나온다. 창원을에 후보를 내느냐 마느냐는 진보신당의 선택이지만, 울산북구에 후보를 내느냐 마느냐는 민노당의 선택이다. 수도권 곳곳에서 지역구가 겹칠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일일이 조정할 것인가. 양당회담이라도 해야 하나? 총선을 앞두고 굳이 갈라서 놓고 바로 지역구 조정을 한다는 양당의 모습이 국민들의 눈에는 얼마나 황당해 보일 것인가. '잠시 별거중일 뿐'이라는 권영길의 말에 맞장구쳐 주는 꼴이 아닌가.
시사저널에서 나와 시사in을 창간한 기자들이 운영하던 블로그 뉴스에 이런 글이 있었다. '이순신이 노량진대첩에서 전사한 것은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하려 하지 않고, 재침략이 불가능하도록 패퇴하는 적을 살려보내지 않으려는 섬멸전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시사in은 짝퉁 시사저널과 섬멸전을 펼칠 것이고, 선의의 경쟁이란 불가능하다'
진보신당은 짝퉁 민노당을 상대로 섬멸전을 펼쳐야 한다. 물론 이쪽이 섬멸당할지도, 공멸할지도 모른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진보신당과 민노당은 공통의 지지기반을 빼앗기 위한 제로섬게임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2004년 총선 직후 20%의 지지를 보내줬던 진보정당의 잠재적 지지층, 블루오션 획득전략은 그 다음이다.
물론 레드오션에서 펼쳐지는 제로섬 게임이라 하여 대놓고 상대방을 주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하지하책이다. 사회당은 민노당에게 끊임없이 '보수4당'따위의 비난을 가했으나 민노당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유일진보정당'으로 자임했고, 결국 대중정당의 노선을 걸었던 민노당이 승리했다. 패배한 사회당은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서는데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이번 총선에서도, 패배한 쪽은 심각한 내상을 입을 것이다. 민노당이 패배할 경우 곧바로 정치생명을 위협받게 될 것이고, 신당이 패배할 경우 현재 잠복해 있는 구신당파와 구혁신파의 갈등, 창당과정에 대한 갈등이 다시 표출될 가능성이 크다. '내용적 창당'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길을 걷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총선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더라도 진보신당이 민노당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은 분명하다. 진보신당은 총선 이후에도 '내용적 창당'을 계속할 수 있는 반면, 민노당은 천영세, 최순영 등과 총선을 앞두고 영입한 '중립적' 인물들을 배제하고 NL당의 색깔을 공고히 할 것이며 이에 실망한 당원들의 이탈도 계속될 것이다. 진보신당만 알아서 제 갈 길을 간다면, 민노당은 알아서 고립을 자초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당에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길을 만드는 것이다. 득표율과 의석수로 나타나는 결과의 성패를 차치하더라도, 총선은 그 길의 중요한 첫 걸음이다. 갈림길 저편으로 떠난 민노당을 바라보고 있기엔 우리의 갈 길이 멀다. 4년의 세월을 돌고돌아 결국 도로 민주당이 된 열린우리당의 전철을 밟으려는게 아니라면 자꾸 뒤를 돌아봐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