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한 국민의 피로감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보수를 택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보수 진영이 두텁거나, 최근 더 두터워졌다. 새누리당이 피상적일지나마 복지 공약과 경제민주화를 자신의 정책으로 내세운 것은
선거 국면 탓만은 아니다. 보편 복지를 정치의제화시킨 정치세력은 익히 알다시피 지금은 폐허가 된 진보정당이었다. 이러한 '독립정치노선'의 한
주기가 마감되는 것을 확인한 자리가 지난 대선이었다.
이 글은 진보신당 홍원표 정책실장이 평등사회노동교육원에서
발행하는 격월간지 <품> 4호에 기고한 18대 대선 평가의 글입니다. 편집자와의 협의를 거쳐 <사랑과 혁명의 정치신문
R>에 함께 싣습니다.
빅텐트로 치룬 2012년 대선
2012년 대선이 끝났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51.55%를 득표했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48.02%를, 무소속 김순자 후보는 0.15%를, 무소속 김소연 후보는 0.05%를 득표했다. 보수파 진영 무소속 후보로 분류되는 강지원 후보의 득표율은 0.17%로 두 노동자 후보보다 많았다.
이번 선거는 정치권 및 시민사회 일각에서 주장했던 빅텐트론이 사실상 완결된 선거였다. 민주통합당 김기식 의원은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시절,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통합된 연합정당 안에서 경쟁하고 역동성을 만들어 국민을 감동시켜야 한다’며 이른바 '빅텐트론'을 제시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한국 정치는 빅텐트의 형태로 수렴되는 게 맞고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김기식 의원이 주장한 것처럼,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세력이 하나의 연합정당으로 통합되진 않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두 개의 정당이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면서 민주통합당이라는 큰 우산으로 들어갔다. ‘국민의 뜻’에 따라 출마했던 안철수는 역시 ‘국민의 뜻’에 따라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를 했다. 선거는 가장 단순한 구도로 진행됐고, 그 결과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합계 득표율은 99.57%에 달했다. 사실상 ‘빅텐트’로 치러진 선거였다.
독립적 정치노선을 주장한 진보신당은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후보조차 내지 못 했다. 설령 진보신당이 대선에 참여했다고 해도, 지난 총선 1.13%의 지지율로 사실상 정치적 시민권을 상실한 당의 역량으로 볼 때 크게 다른 판도가 구성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3세력의 교란 요인이 사라진 선거에서 많은 사람들은 투표율이 결정 변수라고 생각했다.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진영은 투표율이 70%를 넘으면 선거를 이길 것으로 전망했다. 미디어스에 따르면 선거 직전 ‘새누리당은 70% 이하 투표율이라면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한 반면, 민주당은 70% 이상이면 박빙, 74% 이상이면 승리라고 확신’했었다. 이러한 전망은 정치적 실망 또는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투표를 못 하거나 안 하는 유권자들이 ‘빅텐트’에 모인 정치세력의 ‘잠재적 지지자’일 거라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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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전에 없던 높은 투표율로 이어졌다. (사진:
구글)
누가 박근혜를 당선시켰는가?
그런데, 75.8%에 달하는 투표율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가장 단순한 구도로 이뤄진 선거가 국민 최대의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빅텐트’에 모였던 반새누리당 연합군이 패한 것이다. 이유가 뭘까?
안철수 후보 캠프에서 정책을 담당했던 김호기 교수는 ‘진보진영은 최대로 결집했음에도 의제의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구체적 의제를 쟁점으로 만들지 못 하고 ‘박정희 대 노무현’, ‘추상화된 보수 대 진보’의 구도에 그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김윤태 교수는 ‘집권하면 무엇을 할지 유권자들에게 제시해야 하는데 민주당은 과거사 논쟁과 정권교체론에 매달렸다’며 ‘민주당의 경제민주화, 복지 공약 중에 국민의 마음에 와 닿는 공약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박근혜 후보가 여성과 미래를 강조할 때, 문재인 후보는 과거에 집착하고, 설득력 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프레임 전쟁에서 민주당이 무능함을 보인 것이다.
선거라는 한정된 정치 공간에서 프레임 선점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프레임 전략만으로 정치를 평가하는 것은 또 하나의 프레임에 갇히는 것이다. 대중들은 선거 기간의 캠페인만 듣고 투표하지 않는다. 민주당의 무능보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 훨씬 명백했고, 문재인 후보의 전략이 문제 되기에는 TV 토론 등에서 보여준 박근혜 후보의 무지가 훨씬 컸다. 민주당의 무능을 지적하는 것은 반쪽짜리 평가다. 역설적으로 민주당은 10%도 안 되는 후보를 48%의 득표 후보로 만들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다.
후보를 탓하는 평가도 있다. 안철수 후보의 멘토라고 알려진 평화재단 이사장 법륜은 ‘중도층을 잡고 있는 안철수로 단일화 카드를 썼으면 이기고도 남는 거였는데 문재인으로의 단일화는 선택 자체에 실책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역사의 가정을 전제한 평가는 그야말로 ‘감’이기 때문에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기 어렵다. 하지만, 1997년 김대중의 당선과 2002년 노무현의 당선이 모두 보수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러한 평가 역시 반틈의 진실을 담고 있다. 연장해서 본다면, 이후 민주당은 다시 우경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50대를 탓하는 평가도 있다. 주로 인터넷에 회자된 이 평가는 50대 투표율이 89.9%에 달했고, 방송3사 출구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62.5%가 박근혜를 지지했기 때문에 반새누리당 연합군이 졌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 성취를 이룬 50대는 보수적 투표 행태를 보일 가능성이 큰데, 이들의 이례적 투표율이 선거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하지만 이런 식의 평가는 박근혜와 새누리당에 대한 저소득층의 지지율을 설명하지 못 한다. 게다가 지금의 50대는 불과 십년 전, 76.3%의 투표율을 보였고 이 중 60.7%가 노무현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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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선에서 51.5%를 득표하여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됐다. (사진:
인포그래픽)
명백한 사실은 이례적으로 높은 투표율에서 50%가 넘는 국민이 박근혜와 새누리당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한 국민의 피로감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보수를 택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보수 진영이 두텁거나, 최근 더 두터워졌거나 했다는 것이다.
선거 공학에 집중한 평가는 왜 선거에서 졌는지를 밝혀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왜 우리 사회가 보수화되었는가를 밝히지 못 한다. 10년 전에 노무현을, 심지어 권영길을 지지했던 이들이 지금은 왜 박근혜를 지지하는지를 설명하지 못 한다. 마찬가지로 선거 공학에 치중한 ‘빅텐트론’은 선거 전술을 수립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반적인 보수화 흐름을 막아내고 뒤집을 세력을 형성하기에는 적합한 정치가 아니다.
독립정치 노선의 쇠락
새누리당이 피상적일지나마 복지 공약과 경제민주화를 자신의 정책으로 내세운 것은 선거 국면 탓만은 아니다. 그것은 2010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 이후 정치 쟁점이 되었고, 2011년 박원순 시장의 탄생 배경이었던 복지 논쟁의 힘이었고, 이를 지지한 노동자 민중의 힘이었다. 그리고 보편 복지를 정치의제화시킨 정치세력은 익히 알다시피 지금은 폐허가 된 진보정당이었다.
이는 비정규직도, FTA도, 탈핵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도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의제화하고 우리 사회의 보수화를 역행한 것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이어진 진보정치 운동이었다. 고 이재영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의 말을 빌리자면 ‘독립정치노선의 역사적 축적’이 가져온 성과다.
지난 대선은 그 ‘독립정치노선’의 한 주기가 마감됨을 확인한 자리이기도 했다. 독립정치노선의 유일한 성공사례인 민주노동당은 이번 대선에 세 개의 정당이 되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 중 두 개의 정당은 자신의 연합정치 노선을 고수했고, 진보신당은 정치적으로 무력했다. 그리고 두 명의 노동자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이들의 분투는 ‘한국사회주의노동당, 한국노동당, 민중당’과 같이 ‘고립을 면치’ 못 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노력이 독립정치노선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규합하는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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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선에서 두 명의 무소속 노동자 후보가 출마했지만, 한국사회주의노동당, 한국노동당, 민중당과 같이 고립을 면치 못했다. (사진:
제주투데이)
고 이재영 의장은 이렇게도 이야기했다. ‘유럽 사민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한국 운동권은 경박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이야기한다. “우리는 백 년 걸렸습니다.” 그 백 년 동안의 분투와 성장과 변절과 퇴락을, 우리는 10년 만에 따라잡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독립정치노선은 진보정치운동 성공의 최초 근거일 뿐이다. 진보정치운동의 유일한 성공 방법은 독립정치노선의 역사적 축적이다. 그것을 유럽 사민주의자들은 “우리는 백 년 걸렸다”고 술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독립정치노선의 ‘역사적 축적’을 위한 새 진보정치의 여정은 매우 험난해 보인다. 2012년 총·대선을 통해 사실상 완결된 빅텐트 정치의 관성이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연합주의 정치를 주도해 온 통합진보당은 이번 선거에 대해 ‘야권연대 성사로 1:1구도가 성사됐지만 예상과 달리 야권이 패배했다. 질 수 없는 선거를 진 것이므로 새누리당이 심판받은 것이 아니라 야당이 심판 받았다’라고 평가하면서도,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철권통치를 이어 자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재정권 하의 반독재연합전선 형성이 필수불가결하다. 역설적으로 대선 패배(민주당 단일후보의 패배)가 연합정치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주었다’고 진단한다. 진보정의당은 대선에서 후보조차 내지 않았다. 이들의 정치 노선이 가까운 시간에 변할 것 같지는 않다.
정당의 활동 양태를 규정하는 정치 제도 역시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숱한 정치학자들이 ‘후보 단일화’보다는 ‘결선 투표제’가 더 효과적이고, 소선구제보다는 비례대표제 확대가 우월한 제도임을 증명해도, 시민사회 진영의 유력 인사는 10여 년째 단일화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굽은 나무는 질 나쁜 토양을 가르키는데, 이들은 나무 탓만 하는 셈이다.
다시 10년
육아와 의료, 노후와 교육, 주거와 일자리 같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공동의 노력이 개인적 노력보다 효율적이고 우월하다는 경험적 증거와 신뢰가 유토피아적 상상과 연결되는 지점에 좌파와 진보정치가 존재한다.
반대로, 정치가 육아와 의료, 노후와 교육, 주거와 일자리 같은 삶의 문제를 사회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사교육을 시키고, 민간 보험을 가입하며, 주식과 부동산 투기를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에 나선 대중은 어렵게 모은 자원을 가장 잘 지켜 줄 것 같은 정부를 선택한다. 자본주의와 보수정치가 존재하는 곳이다.
공동의 노력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형성한다. 나의 이해관계가 우리의 이해관계가 되고, 우리의 범주가 확장될수록 연대의 물질적 기반은 강화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임금체계에 들어가고 같은 사회보장 시스템에 속할수록, 그들의 연대는 더 수월하고 그들의 결속력은 더 강해질 것이다. 그들이 같은 노동조합에 속하고, 같은 정치조직에서 만나 비슷한 정치 지향을 공유하는 것도 연대의 물질적 기반이 될 것이다. 지난 시기 진보정치는 연대를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이 투쟁 지원을 넘어 사회연대의 물질적 기반으로까지 확장되진 못 했다. 이것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진보정치의 핵심 영역에서 더욱 심각했다. 새로운 진보정치는 연대의 물질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제도를 바꾸고 정책을 입안하며 문화와 관습을 정착시키는 것을 자신의 주요 과제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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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거리를 뒤덮었던 새누리당 복지공약 현수막들. 진보정치의 이념은 더 이상 현대화되지 못했고, 정책은 이제 보수정당도 베껴쓰는
형편이다. (사진: 구글)
다시 10년의 출발은 정치 이념의 현대화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지난 시기 민주노동당은 이념으로서 사회주의, 정책으로서 사민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념은 더 이상 현대화되지 못했고, 정책은 이제 보수정당도 베껴 쓰는 형편이다. 이후의 진보정치는 지난 10년의 그것을 더 이상 반복할 수 없다. 진보신당 창당 이후 처음인 대표단 경선에서 이러한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 각 후보는 당의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 무지개 좌파정당, 녹색사회주의, 좌파대안정당을 제시하고 있다. 참여하고 토론하고, 비판하고 재정립이 필요한 일이다.
진보정당에게 15년 전 중앙정치는 아직 경쟁자가 없는 블루오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4개의 정당이 ‘진보’로 과포화된 레드오션이다. 반면 지역은 지방자치를 여전히 정치가 아닌 행정으로 인식할 정도로 미성숙하고, 의회정치 역시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지역의 대중 운동은 다양한 이슈로 자라나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엮이지는 않았다. 이제 신생정당이나 다름없는 진보정치가 지역을 주목해야 할 이유다.
진보신당의 많은 당원들은 2013년 한 해가 ‘다시 10년’을 계획하고 이를 위한 체질 개선이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길 바라고 있다. 1월에 진행되고 있는 대표단 선거는 철저히 전환과 출발선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보다 많은 이들의 참여와 토론, 비판과 재정립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