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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에메랄드 성을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초록색으로 된 안경을 써야 하지요. 그러면 눈앞에는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도시가 펼쳐지지요. 저에게는 프랑스 북부에 자리잡은 도시 릴이 그런 도시였습니다. 지역 수준에서 사회적경제를 지역개발의 주요한 의제로 보고 있는 지방정부 사례를 찾던 중, 몇 차례 추천을 받은 릴시는 유럽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이미 저에게는 ‘지방정부의 모범사례’였습니다.

엄형식 당원이 벨기에에서 사회학 공부를 하면서 접해온 유럽의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 등에 대해 편지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본 기사는 인터넷 매체 <레디앙> 기획기사이며 <레디앙>과 협의하여 동시게재하였습니다. (원문 바로가기)



J선생님께,

“어딘가, 무지개 너머~”로 시작하는 오즈의 마법사 노래와 영화를 한 번 즈음은 직간접적으로 접해보셨을 것입니다. 오즈의 에메랄드 성을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초록색으로 된 안경을 써야 하지요. 그러면 눈앞에는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도시가 펼쳐지지요…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자 하는 심리를 조롱하는 재미난 이야기입니다.

이번 편지와 다음 편지에서는 사회적경제와 협동조합이 발전해있다고 알려진 도시들인 프랑스의 릴, 스페인의 몬드라곤,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 도시들에 대한 진지한 자료나 소개는 많이 되어 있으니, 이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여행자로서의 간략한 인상, 그리고 그 ‘초록빛 안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 도시에 대한 인상이 형성되는 과정은 매우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 도시에 가기 전에는 그 도시를 처음 알게 된 계기, 도시를 소개했던 책자나 자료가 중요하게 첫인상, 또는 첫인상에 대한 기대를 만들게 됩니다.

막상 방문해서는 가장 먼저 공항이나 도시입구, 도시센터 및 공식자료에서 반복되는 공식적인 이미지와 컨셉이 눈에 들어오죠. 그리고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 함께 간 사람들,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들, 방문한 장소, 먹은 식사, 방문기간의 날씨 등등 다양한 요소들이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는 방문 이전에 가졌던 첫인상을 확인 또는 (그런 경우는 많지 않지만) 부인하는 방식으로 간단하게 인상을 마무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많은 돈을 들여 짧은 기간에 ‘사회적경제와 협동조합이 발달한 유럽의 선진사례’를 배운다는 사명과 열정에 불타서 오시는 경우에는 현지에 와서 그 도시의 다양한 측면을 통해 만들어지는 인상 보다는 한국에서 이미 만들어 온 인상을 다시 가져가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프랑스 북부에 자리잡은 도시 릴이 그런 도시였습니다. 지역 수준에서 사회적경제를 지역개발의 주요한 의제로 보고 있는 지방정부 사례를 찾던 중, 몇 차례 추천을 받은 릴시는 유럽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이미 저에게는 ‘지방정부의 모범사례’였습니다.

특히, 현 시장인 마르틴 오브리는 사회적경제 개념을 유럽연합 수준으로 확장시킨 쟈크 들로르 유럽연합 전 집행위원장의 딸이자, 사회당 죠스팽 정부에서 노동연대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사회적경제와 연대경제에 대한 현황보고서를 녹색당 의원인 알랭 리피에츠에 위임하여 작성하도록 한 것으로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죠.

이러저러한 기회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방문객들과 함께, 또는 저 혼자 릴시를 약 10회 정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 한국 측의 초청으로 릴시 관계자들과 함께 한국에 1주일 정도 체류를 하기도 했지요. 그 사이 릴시에 대한 저의 인상은 대략 3번 정도 변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처음 방문해서 사회적경제 담당 부샤르 의원 및 관련 단체들과의 만남에서 들었던 설명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 “야! 이런 곳이 있구나!”

설명에 따르면, 릴시는 경제활동인구의 12% 가량이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이는 프랑스 평균에 약간 웃도는 수준입니다. 전통적인 사회적경제 조직들의 광역단위 (노르빠드깔레 주) 연합체와 보다 운동적인 성격이 강한 연대경제 조직들의 광역단위 연합체가 동시에 소재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전통적 사회적경제 조직들의 광역단위 연합체들은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에서 조직되어 있지만, 연대경제 조직의 연합체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라 할 수 있죠.

2001년부터 지역 연대경제 운동 활동가 출신이자 녹색당에 당적을 둔 부샤르 의원이 릴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사회적경제 담당의원을 맡아 왔는데(프랑스는 의원내각제 방식으로 지방정부를 구성합니다. 지방선거의 결과에 따라 종종 연립정부의 방식으로 다수세력을 구성한 여당의 의원들은 각각 전문분야를 담당하여 정무직으로 해당 분야를 총괄하게 됩니다), 이 또한 당시로서는 드문 경우였다고 합니다.

부샤르 의원은 현재까지도 사회적경제를 주요 의제로 삼는 프랑스 지자체들의 네트워크인 RTES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지방정부에 사회적경제 담당 의원이 역할을 하기 시작하면서 연대경제 연합체인 APES의 구성도 촉진되었고, 주로 소규모인 연대경제 운동조직들을 위한 공간인 ‘사회연대경제의 집’과 사회연대경제 발전을 위한 다년간 계획이 5년 단위로 수립되어 추진, 점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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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ES – 노르빠드깔레 지역 연대경제 조직 연합체, 여러 작은 연대경제 조직들과 함께 사회경제연대의 집에 입주해있다.


그리고 몇 차례 더 방문하면서 얻은 다른 인상, 정확하게 말하면 ‘분위기 파악’ (실망까지는 아니구요…) “설명들에 비해 실제 조직과 활동은 뭐 그다지 우리와 다르지 않고, 종종 규모나 시스템에서는 우리보다 작거나 덜 발달해있구나”

유럽 사회적경제가 소개될 때마다 경제활동인구의 5~15%를 사회적경제가 점하고 있다는 사실에 종종 놀라곤 하는데, 사실 한국도 유럽과 같은 방식으로 집계를 한 결과 2006년 기준으로 제3섹터가 고용하고 있는 고용인구가 (농업인구제외) 경제활동인구 중 6.7%를 점하는 것으로 보고됩니다 (김혜원 외, 2008).

특히 프랑스에서는 금융업에서 사회적경제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이 부문의 고용비중이 높은데, 여기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경제’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 협동조합 금융을 많은 사람들이 일반금융기관과 구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연대경제 연합체 APES는 단체회원과 개인회원 등 약 380여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대경제에 대한 나름의 지역적 개념규정을 내린 헌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헌장에 동의하는, 즉 가치에 찬동하여 실천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헌장에 맞추겠다고 서명을 결의를 한 회원들은 90여 개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방문객들의 표정에는 늘 “애걔…”하는 표정이 스쳐지나 가지요…).

방문했던 개별 현장들의 상당수는 취약계층 노동통합을 위한 각종 정부프로그램과 연계되어 있고 (즉, 경제적으로 자립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인데, 유럽에서 대부분의 노동통합 관련 조직들은 경제적 자립이 목적이 아니라 취약계층의 노동시장 진입 자체가 목적입니다), 고용인원이나 사업규모도 매우 적은 편이고 (대개 10명 내외), 사업아이템도 청소, 재활용 등 평범하거나, 자신들만 혁신적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에서도 종종 찾아 볼 수 있는 물을 사용하지 않는 세차를 친환경 세차라며 무척이나 어렵고도 자랑스럽게 설명해주시던 분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건설 분야 창업보육을 지원하는 협동조합에 대한 열정적인 소개를 듣고 몇 달 후 그 협동조합의 안부를 다른 협동조합에 물었더니, “내부 리더십 문제 때문에 문을 닫았다”는 어찌 들으면 평범한 이야기를 나름 충격적으로 듣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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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카페 – 작은 규모이지만 다양한 시민단체들의 모임공간이자 사랑방 역할을 하는 협동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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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기농 재배 및 판매를 하는 Vert’Tige. GMO 조작식품 반대 플랑카드가 눈에 띈다.


하지만 몇 차례의 방문을 통해 릴시에 대한 ‘인상’이 점점 걷혀지고, 즉, 초록빛 안경을 내려놓고 들어가면서 제가 발견한 것은 “어려운 현실에서, 꿈꾸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비장하게 그러나 즐겁게 현장에서 땀흘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식 프리젠테이션에서는 멋지게 설명을 하다가도, 뒷풀이에서는 정치인들과 공무원들 뒷담화를 하면서 답답함을 토로하고, 열변을 토하며 토론을 하다가도 “우리 딸이 한국,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데 어디가면 살 수 있냐”고 장난꾸러기처럼 미소짓고… 멀리 갈 것 없이 한국에서 늘 부딪히던 그 사람들과 눈빛, 머리색만 다를 뿐인 똑같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굳이 차이점이라면, 릴시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좀 더 ‘확신범’에 가까워 보인다 정도? 하지만 이 또한 점차 큰 차이가 아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구태여 외국까지 오지 않더라도, 우리 삶의 근처에서 체득한 삶의 지혜와 우리 역사와 전통에서 찾을 수 있는 협동과 연대의 역사를 재해석하면서 점점 더 많은 분들이 우리의 현장에 발딛은 문제의식과 그리고 상황에 맞는 해법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사족만 하나 더 붙이자면, 부샤르 의원이 한국 방문 시 강연에서 강조한 지자체의 역할을 되새겨 볼 만하지 않을까 싶군요. “지자체의 역할은 무엇보다 지역의 활성화에 놓여있습니다. 지역의 주체들이 주도적으로 행동하고 발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야지, 이들을 도구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역동성을 만들고 유지시키는 것은 진지함, 끈기, 겸허 그리고 시간이 요구되는 힘든 과정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정책들이 풍부해지고, 강력해지고, 의미를 갖는 것은 서로의 관점을 맞추어 가고, 힘을 나누어 가짐으로서 가능하다고 장담합니다.” 지자체에게나 시민사회에게나 모두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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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방문시 부샤르 의원, 전 전국노동통합관련위원회 사무총장 자크 뒤게라, 필자


[참고문헌] 김혜원 외, 2008, 제3섹터 부문의 고용창출 실증연구, 한국노동연구원/한국보건사회연구원

[ 엄형식 (진보신당 유럽당협 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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