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구의회 화덕헌 구의원이 의정일기를 연재합니다.
화덕헌 의원은 지역 내 현안들에 대해 수치를 꼼꼼히 분석하여 문제제기하고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등, 생활정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기초의원으로
지역 언론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최근에는 부산시의회에서 민주공원 예산을 반 이상 삭감한 데 항의하여 옷을 '반만 입고' 하의실종 시위를 벌여
또 한 번 이슈가 되었죠^^
직업 사진작가이기도 합니다. 아파트와 대형교회를 주제로 작업하거나 주공 AID아파트 철거과정을 사진으로
남기는 등 다채로운 작품활동을 통해 오늘의 한국사회를 담아냈습니다. 구의회에 간 노랑머리 사진작가, '위원회 공화국'을 다룬 첫
의정일기에 이어 이번에는 '성인지 예산'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았습니다.
"화장실법"을 아십니까
작년 말 행정사무감사를 진행 중이던 해운대 구의회. 쭈뼛거리며 남성 의원들이 여자화장실을, 여성 의원들은 남자화장실을 들어갔다. 남성 의원들은 여자화장실의 좁고 열악한 시설을 보고 충격받았고, 여성 의원들은 변기 갯수가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충격을 받았다. 성평등은 화장실에서부터 멀고 먼 이야기임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이란 게 있다. 여자화장실의 변기 수는 남자화장실의 대‧소변기의 합 이상이 되도록 설치해야 한다는 법률이다.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장소/시설의 공중화장실 역시 여자화장실 변기 수가 남자화장실 대‧소변기 수의 1.5배 이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규정이 지켜지기는커녕 1:1의 비율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터미널과 휴게소, 야구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마다 여자화장실 줄이 길게 늘어선 것만 봐도 그렇다.
이 느닷없는 '화장실 순회'는 작년 말 해운대구 행정사무감사 중 '성인지 예산'을
분석-지적하던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다.
이름도 생소한 '성인지 예산'은 지난 2006년 말 국회와 여성계가 주도하여
국가재정법에 도입되었고 3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2010년 예산안에 처음으로 첨부되었다. 예산편성과 집행, 결산 등 국가재정의 운용 과정에서
성차별 및 인종차별 관행을 염두하여, 재정의 편성 단계에서부터 차별적 요인을 분석-개선하고 성평등과 사회적 형평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이다.
성인지 수준 고스란히 보여주는 '성인지 예산'
하지만 성인지 예산에 대한
온전한 개념파악조차 안되고 기준과 원칙이 없어, 국회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까지 성인지 예산서는 그야말로 엉망이다. 경향신문은 국회 예산정책처의
'2013년 성인지 예산분석' 보고서를 분석하여 상당수 사업이 성평등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음을 지적한 바 있다. 통일부의 탈북자 지원사업이나
교육과학기술부의 장학재단 출연 사업 등이 성인지예산으로 편성되는 식이다.(관련 기사)
성인지 예산이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첫째, 예산편성 요구단계에서부터 성인지 예산의
대상이 되는 사업 선정을 잘해야 한다. 국회에 제출된 성인지 예산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아예 대상 사업 자체가 엉뚱하게 선정된 경우라면
그 다음 내용은 보나마나이다.
두 번째는 사업 대상자와 사업 수혜자에 대한 치밀한 통계와 분석 과정이다. 성인지 예산은 단지
남성과 여성을 성별을 기준에 맞춰 산술적으로 분류하고 예산을 5대5로 나누는 기계적인 제도가 아니다. 예컨대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남성이 더
적다고 해서 산술적으로 남성 참가자를 늘리겠다는 예산서를 '성인지 예산'이라고 제출하는 건 수혜 대상에 대한 사회적 분석이 완전히 실패한
경우다.
산술적으로 성별 기준 5대 5로 나누는 기계적 제도 아냐
좋은 제도나 새로운
정책을 만들고 입안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미 있는 정책의 내용을 따져보고 집행과정을 알뜰하게 챙겨보는 것이다. 전년도
사업에 대한 행정사무감사를 실시하면서 동시에 곁가지로 각 부서별 사업 중에 성인지적 관점을 적용해 볼 만한 사업이 무엇인지 요모조모 뜯어보고
자료를 만들었다. 이웃 다른 구의회와 부산시의 예산서도 받아보았다. 역시 대동소이했다.
해운대구 기획조정실 등 총 23개 부서에서 23개의 성인지 예산 사업을 선정하여
제출한 보고서들을 보면, 성인지적 관점을 파악하지 못한 사업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기획조정실에서 제출한 <정보화
교육 사업>, 일자리복지사업단의 <지역공동체 일자리 사업>, 세계시민사회과의 <늘푸른 아카데미 사업>, 관광문화과
<소년소녀합창단 운영>, 환경위생과 <환경행사교육참여 사업>, 청소행정과 <해수욕장 청소 사업>, 재난안전과
<자율방재단구성>, 보건소 <금연클리닉 사업>, 해운대문화회관 <예술아카데미 사업> 그리고 도서관 2곳의
<도서관 이용 및 교육> 등 13건은 사업의 성격상 남성의 참여율이 저조할 수밖에 없는 사업에 남성 참가자들의 비율을 끌어올리겠다는
식이거나 반대로 여성의 참여가 저조한 사업에 여성의 참여수를 늘리겠다는 식이다. 이는 생물학적 성(sex)에 대한 양적 균형에 치중하여 남성
혹은 여성 참가자를 확대하는데 예산을 사용하겠다는 웃지 못할 발상이다.
행정지원과 <출산/육아휴가 대체인력지원사업>,
교통행정과 <교통 안전물 시설 사업>, 늘푸른과 <휴식공간조성 사업>, 민원여권과 <직원 친절교육 사업>,
도시디자인과의 <도시시설물 디자인 개선 사업>, 건설과의 <하수시설물 정비사업>, 토지정보과의 <도로명주소
사업> 처럼 성인지적 관점이 명확하지 않거나 이용객 일반의 편의를 도모하는 사업이 성인지 예산사업 명목으로 둔갑해서 올라온 경우도 일곱
건이나 된다.
반대로 비교적 성인지적 관점을 어느 정도 파악한 사업은 23개 사업 중에서 자활근로에 있어서 <여성맞춤형
일자리>를 발굴하는 주민복지과 사업과 고령화 사회에서 여성 고령인구 증가에 대비한 <여성노인 일자리 확대>의 행복나눔과 사업,
관광시설사업소의 <화장실 여성용 변기 확대> 등 3개 사업 정도에 불과했다.
화장실이 젤
급해!
각 부서별 심사 과정에서 분석을 토대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 보았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행정지원과를 비롯하여 건물이나 시설물을 보유하고 있는 부서의 공통 사항으로 화장실 문제를 제기했다. 화장실법을 참조하여
여성화장실의 규모와 시설이 법률 기준에 미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했다.
남자 화장실에 기저귀 교환대를 설치할 수도
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남자화장실에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으로 분류되지만, 육아가 여성의 역할로만 인식되는 기존 사회문화적 편견을 개선하는
사업이므로 성인지 예산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화장실 청소원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남성 화장실은
남성 청소원이 청소하도록 할 것을 지적했다. 남성 화장실을 여성이 청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남성이용자나 여성청소원 모두에게 불편과 불쾌를
초래한다. 이럴 경우 남성 청소원을 추가로 고용하여 남자화장실을 청소하도록 예산을 쓴다면 이 또한 성인지 예산의 사례가 될 수 있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성인지 예산, 성(gender)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 개선도 포함돼
다음은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세계시민과의 순서. 방학 중 영어교실 지원사업 프로그램의 내용을 살펴보면 '원어민을 통한 영어교육'으로 명시하고 있다.
예년의 예산집행에 비추어보면 여기서 말하는 원어민이란 사실상 '앵글로 섹슨 계의 백인'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유창하게 사용한다
하더라도 인도 출신이나 필리핀 출신은 원어민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설령 미국 출신이라 할지라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른바 흑인)도 역시 원어민
강사에 포함되지 않는다. 명백한 인종차별적 편견인 셈이다.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계 재미 교포의 경우도 원어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외국어 교육에 있어서 이중 언어 교육 정책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감안한다면, 오히려 이중 언어 사용자가 우대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형편은 전혀 그러하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가 원어민 개념을 새로이 하여 원어민교사 채용 기준을 인종적으로 개방한다면
이는 단지 교사수급 문제를 뛰어넘는 우리사회에 팽만한 인종차별의 사회적 기제를 바꾸어내는 동시에, 성인지 예산의 모범이 될 것이다.
평생교육 프로그램, 5대 5 산술적 형평 정책은 맞지 않아
늘푸른 아카데미를 비롯한
각종 평생교육 프로그램의 경우, 사업대상자 및 수혜자 분석이 특히 중요하다. 단순히 성별 참가자 비율에서 여성이 월등히 높으니 "남성 참가자를
늘리는 게 성인지 예산"이라는 식으로 산술적으로 접근한 것은 사회적 성별격차의 원인은 제대로 분석하지 않은 데서 오는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다.
사업 수혜자에 있어서 단순히 남녀 비율이 아니라, 수강생들의 취업률이나 그들이 살아온 60년대-70년대-80년대 우리
사회의 남녀별 상급학교 진학률을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토대로 삼는다면 남성참여자를 우대하는 산술적 형평 정책이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프로그램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 연장선상에서 40-50대
남성에게 요리 과목을, 같은 세대 여성에게 자동차 내연기관 구조와 원리를 가르치는 프로그램 등을 지원한다면 이 또한 성인지 예산에 포함될 수
있다. 요즘 중학생들의 경우 남녀 공히 기술과 가사 과목을 모두 이수하지만,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남학교에서는 기술과목을, 여학교는
가사(가정)과목으로 분리해서 가르치는 교과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유리천장' 부수는 것도 성인지
예산이다
'유리천장'은 고위직/임원으로 진급할수록 여성 비율이 현격하게 줄어드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는 우리 사회,
특히 공직사회에 있어 성인지 예산의 필요성을 절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이와 관련해서 해운대구의 통계 현황을 보면, 아래 표에
나타난 것처럼 낮은 직급에 있어서 남여 공무원 비율은 3대 7에서 4대 6 정도로 여성 구성원 비율이 월등히 높지만 6급에서 역전이 이루어지다가
5급 이상부터는 1대 9 수준으로 여성의 비율이 현격히 낮아진다. 물론 이는 각 직급의 임용 당시 구성비를 토대로 종단적인 연구를 통해 면밀히
분석해봐야 더 정확히 파악되겠지만,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남성 중심의 사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다지 섣부른 추측은 아닐
것이다.
인사에 있어서 이러한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적인 요소를 개선하기 위하여 여성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이를테면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교육이나 연수 등의 기회에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는 조치를 한다면 성차별 개선에 매우 중요한 진전이
있을 것이다. 특히 남성의 육아휴직을 재정에서부터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부서 내 분위기 또한 적극 조성하는 조치/사업이 실시된다면, 여성의 육아
부담이 감소하고 직장 내에서 여성들의 근무연속성이 담보될 것이며 이는 결국 여성의 승진 기회를 늘리는 효과로 작용할
것이다.
"성인지 예산에 대해 발언한 유일한 의원" 평가도
2013년 해운대구 예산
심의가 끝난 후 일선 공무원들로부터 내가 성인지 예산에 대해 발언한 유일한 의원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몇 가지를 정리하여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보냈더니 추가 보도로 이어졌다. 주민도시보건위원회에서 기획관광행정위원회로 옮겨 처음 실시한 행정감사라 거의 고3 수험생 수준으로 공부하고
준비했는데, 뿌듯함에 피로가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성인지 예산은 우리사회의 여러 관습이나 문화에 스며있는 남성 중심의 성적 불평등
요소를 예산 부문에서부터(을 통해) 개선하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다. 따라서 예산의 배정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해당 사업의 성격과 목적을 사회적,
역사적 연원을 좇아서 성인지적 관점으로 면밀히 분석하여 예산 편성이 초래할 수혜자와 소외자를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정치의 가장 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일개 구의원에 불과하지만, 말단에서부터 온전한 평등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것이야말로 진보정치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확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