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소, 너나 먹어”에서 무력함을 느끼다
2008년 초여름, 광우병 위험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이 타올랐다. 2007년 12월 대선과
2008년 4월 총선은 예상대로 이명박 정권의 압승으로 끝난 상태였다. 나에게 “미친 소, 너나 먹어”, “이명박은 물러가라”라는 2008년
촛불의 구호는, 4년 후의 민주연립정부 수립을 염원하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무기력함이 온몸을 휘감았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2008년 총선에서 ‘초록 좌파’를 지향적 가치로 내걸었던 사회당은 초록정치연대(현재는 녹색당에 합류)와 함께 “미친 소, 너도 먹지 마”라는
손피켓을 돌리는 소극적(?) 활동을 했다. “미친 소, 너도 먹지 마”라는 선전은 이 작업에 참여했던 모두에게 좋은 기억과 이후 활동력을
만들었다.
한편, 촛불 광장의 구석에선 기륭전자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있었다. 이후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라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졌고, 2009년을 맞이했다. 공권력에 의해 국민이 살해당하고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는 용산학살이
벌어졌다. 노무현, 김대중 두 전 대통령이 서거하는 등 2009년은 대형 이슈가 빵빵 터진 한 해였다. 또한, 2009년은 한국사회에서
기본소득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좌파 정당의 보편 의제 만들기
정당운동을 계속하면서 들었던 초보적인 의문이 하나 있었다. 정치운동, 특히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정치운동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정책이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수렴하는 경향이 분명 눈에 띈다. 그렇다면 좌파 정당은 다양한 사회 대안을 자신의 내용과
전략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 대안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아야 하며,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제시된 각종 좌파적 사회 대안의 총합이며, 하나의 흐름으로
구성되는 것이 좋다. ‘진보신당’이라는 좌파 정당이 지향하는 다양한 사회 대안을 기본소득 발상과 보편적인 하나의 흐름으로 구성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20세기 후반, 전통적으로 좌파가 주목했던 네 가지의 사회적 소수자 의제가 있다. 비정규직, 여성, 장애인, 이주 등.
많은 좌파 운동가들이 앞으로 중요한 의제로 등장할 각각의 운동에 투신했고, 일정한 조직적 성과와 운동 담론을 만들었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 보편
의제로 등장하는 과정이 있는데, 비정규직 철폐 운동은 특수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노동자는 하나일까
비정규직 철폐 운동은 한국에서 독특한 지위를 가진다. 민주노조운동의 쇠퇴와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가
겹쳐지면서 이중의 질곡에 부딪혔다. 비정규직 운동가들의 헌신적 노력 덕분이겠지만, 자본의 탄압과 조직노동의 배제라는 이중의 질곡은 비정규직 철폐
운동을 (역설적으로) 보편 의제 운동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해답은 분명치 않다. 의문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사회적 연대’라는 추상적 답변만
이어질 뿐, 현실적 해법도 불분명하다.
비정규직 조직화와 의식화는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가. 비정규직에 대한 모든
법제도적ㆍ사회문화적 차별을 없애면 되는가. 그런 차별을 없애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비정규직조차 되지 못하는 실업자는
무엇인가.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정말로 연대가 가능한 사회적 존재들인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정규직 철폐는 거의 혁명적 상황에서나 가능하지
않을까. 비정규직이 정규직 되는 것이 운동의 목표인가. 정말로 노동자는 하나인가. 등등.
“일하지 않아도 생존할 권리”
고민은
자연스럽게 현실의 좌파정당이 지향하는 대안에 관한 질문으로 흐른다. 현재 한국사회의 좌파들이 공유하는 기반은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다. 좌파가 지향하는 대안적 가치는 현실로 내려오기 위해 논리정연한 말과 글로 정리돼야 한다. 로드맵, 이행 전략 등이 필요하다.
그동안 좌파의 가치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반(反)자본주의든 탈(脫)자본주의든 신자유주의를 넘어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자본주의
작동의 핵심 원리는 스스로 가치 증식하는 자본을 멈추는 것이며,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탈(脫)상품화시키는 것이 그 시작이다. 그래야 자본의 운동을
정지시키든 뭐든 하지 않겠는가. “일하지 않아도 생존할 권리”(2009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발표)와 같은 투쟁 과제가 제시될 수밖에 없다.
오래전부터 좌파 진영은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했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일자리 나누기가 가능하고 완전고용에
접근할 수 있다. 교육, 의료, 주거, 보육, 노후 등의 보편 복지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면 사회안전망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고용 없는 성장, 성장 없는 거품, 기계화에 따른 일자리 감소 등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위기에 빠졌다.
완전고용은 특정한 자본주의 시기에나 가능할 수 있었던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넘어선, 다른 형태의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실마리가 필요했다. 기본소득은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기본소득을 주목한 가장 큰 이유는 임금노동과 생존의 고리가 없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의 좌파적 담론
한국사회에 기본소득을 최초로 제시한 사람들은
대체로 좌파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기본소득에 대한 담론 역시 좌파 중심으로 짜여있다. 신자유주의 최첨단을 달리는 한국에서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
종식을 위한 과제로 논의를 시작했기에 좌파적 담론으로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기본소득 운동 초창기부터 “모두에게
기본소득을”이라는 보편 의제 구호가 등장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실재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아직 한국의 우파 세력들에게 이해관계가 없을
뿐, 기본소득은 우파적으로 재구성될 가능성이 있는 의제 중 하나다.
기본소득 발상의 매력적 가치를 느끼게 해준 말이 있다. 좌파
케인즈주의자로 알려진 제임스 미드(1907~1995)라는 영국의 경제학자가 말년에 이르러,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완전고용은 모든 사람이
법정 최저임금 절반 정도를 받으면 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제임스 미드는 ‘사회 배당’이라는 기본소득의 원시적 형태를 대안으로 언급했다.
제임스 미드의 말에서 비참한 완전고용사회라는 개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임금 인상과 유효 수요 창출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본의
이윤 확대와 지속적 경제성장률을 보장받으려 했던 케인즈주의는 과도한 인플레이션 압박과 독점 자본의 막강 권력에 의해 무너졌다. 금융 수탈,
노동유연화, 민주주의 해체, 사유화라는 새로운 출구를 통해 자본주의 역사의 한 시대를 장식한 신자유주의 역시 파국을 앞두고 있다. 신자유주의
파국의 시대에 좌파 정당의 길, 좌파의 길을 잡아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그 어딘가,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그 어딘가를 찾는
것이 새로운 길에 관한 논의이지는 않다. 그 길에서 기본소득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글에 담았으며 10여 회에 걸쳐서 그 길을 말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