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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피임약 처방은 어렵겠다.

논란이 많던 사전/사후 피임약에 대한 의약품 분류 수정, 전환 계획이 전면 취소되었다. 요약된 내용은 결국 사전 경구피임약은 여전히 일반 의약품으로 두고 보완을 실시하고, 응급피임약인 사후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현행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요구하던 사후피임약에 대한 접근을 높임으로 원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을 예방할 수 있는 제도는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다른 사회에서는 피임약을 여성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이에 대한 의료지원이 일상화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는 피임약에 대한 과도한 불안과 이로 인한 문란한 성문화가 조장된다는 우려로 여성들의 피임약 복용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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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피임약 먹어?


나의 경우만 해도 4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피임약을 먹어 본 경우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우선 생리불순 등 여성 질환이 없었기에 호르몬 조절치료제로 사용되는 경구피임약을 복용할 필요가 없었으며, 또 하나는 경구피임약을 먹으면 임신이 어려워진다거나 여성의 건강에 많은 해를 끼친다는 떠도는 소문들을 그냥 그대로 믿고 지금껏 지내온 것이다.

사후피임약은 그야말로 임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두 번 복용한 경험이 있다. 그것도 아이를 둘이나 낳고 결혼관계에 있음에도 사후피임약을 처방해 달라고 병원 가기도 약국서 처방전 내밀기도 민망했던 기억이다. 그것도 24시간 이내 먹여야 효과가 높다는데 한참 동안 병원서 진료시간 기다려서 처방을 받아야 하니 시간을 일부러 내기도 만만치 않다.

얼굴이 철판처럼 두껍다는 아줌마들도 사후피임약 처방이 쑥스러운데 비혼의 여성이나 청소녀들의 경우는 하루 이틀 지체하다 보면 피임의 시기를 놓칠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응급피임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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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구피임약에 대한 근거 없는 불안함을 가고 피임약을 먹는 여성에 대한 시각은,

‘문란한 ...’
‘저렇게 먹다가 나중에 아이는 어떻게 낳으려고’
‘혹시 피임약 때문에 임신이 안 되는 거 아냐? 피임약 장기 복용으로 자궁암 걸린 건 아냐?’
‘어쨌든 피임약을 많이 먹는 거 보니 그렇고 그런... ’ ...

등등 왜곡된 시각을 갖는 우리사회의 여성들과 달리 다른 사회에서는 피임약이 여성의 건강을 지키는 처방이 되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 또한 “ 피임약을 피임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피임을 여성의 몸 안에서만 이루어지게 하고 남성들은?” 이라고 물었는데 여성의 건강을 둘러싼 다른 사회의 대응방식이 다른 점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각기 다른 사회의 피임약과 여성의 몸에 대한 시각의 차이를 살펴봄으로 아직도 피임약의 의약품 전환과정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우리사회에서 사회적 합의와 관심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나의 경험과 사뭇 다른 독일에 있는 황수옥 당원의 피임약접근 사례이다. 

독일에서 피임약은

대학에서 파티가 있던 어느 날 저녁 지하철을 타고 있었습니다. 맞은 편엔 대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과 차림의 한 여학생이 앉아 있었고요. 몇 정거장이 지난 곳에서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탔고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여학생에게 아는 체를 하는데 친구들인 듯 했습니다. 왁자지껄 시끄러워 잠시 엿들어 보니 가져온 술병을 꺼내 보이며 오늘 파티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더라고요.

근데 이야기 도중 여학생이 가방에서 뭔가 뒤적거리더니 꺼내어 먹는 게 피임약이었습니다. 아주 작은 알약이라 물 없이 먹을 수 있는 약이라고는 하지만 마치 가방에서 사탕 하나 꺼내 먹듯이 자연스레 약을 꺼내 먹더라고요. 주위의 남학생들도 그 모습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으로 보더니 계속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는데 괜히 저만 신기한 듯 한참을 바라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임약이라는 게 한 달의 삼 주를 매일 매일 먹어야 하니 잊지 않고 복용하려면 때와 장소를 가리기가 쉽지 않겠죠. 그래도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을까 본인은 그렇다고 해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학생들의 표정에 어떤 변화도 읽을 수 없다는 것도 좀 신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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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가만 생각해보니 독일에선 가임기 여성의 55%가 경구용 피임약을 복용하여 피임을 한다고 하니 어쩌면 저 모습이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을 거란 결론을 내렸지요. 어릴 적부터 집에서 엄마가 누이들이 복용하는 모습을 자주 봤을 거고 그러다 좀 성장해선 친구들이 본인이 혹은 여자친구가 복용하고 있을 테니까요. 이 상황을 잠시 한국을 배경으로 옮겼더니... 웃음밖에 안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지만 한국에서는 한번도 피임약을 직접 본 적도 없고 주위에서 먹는 다는 사람들을 본 적도 없네요. 그럴 만도 한 것이 한국에선 경구용 피임약 복용률이 2.5%에 불과하다고 하네요.

독일에서 사전피임약은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살 수도 있고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처방전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약과 없어도 살 수 있는 약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차이가 있는 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을 보니 그냥 약국에서 사먹는 사람들과 병원의 처방전을 가지고 사먹는 사람들로 나뉘더군요.

약국에 물어보니 약 성분에 특별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개개인의 게으름 정도(?)나 혹은 건강을 생각하는 정도의 차이로 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처방전이 있다고 더 싸게 살 수 있거나 하지 않고 보통 한 달치 약값이 5 - 17 유로 사이입니다. 같은 약이 몇 개 월치 한꺼번에 들어있는 약을 사면 좀 싸게 살 수 있어요. 다른 약과 마찬가지로 20살 이하 인 경우 피임약값이 의료보험에서 지급됩니다.

실제로 처방전을 받기 위해 처음 병원에 가면 의사가 간단한 지병의 여부 정도를 묻고 상태에 맞는 약을 처방해줍니다. 보통 여성이 원하는 상황에 따라 1개월부터 6개월치 약을 살 수 있는 처방전을 써주는데 처음에만 의사와 상담을 하고 그 뒤부터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처방전만 써줍니다. 약이 필요할 때 전화로 처방전이 필요하다고 하고 가면 의사를 만나지도 않고 그냥 처방전만 받아 나오는 식이 됩니다.

생각해보니 독일에서 피임약은 말 그대로 "약" 이네요. 처방전이 필요하면 처방전을 받아다 복용하고 귀찮으면 그냥 약국에서 사다 먹고. 그 날 지하철에서 만난 그 여학생의 모습에서 '나 섹스하고 싶어' 내지는 '나 지속적으로 섹스를 하고 있어' 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다거나 친구들이 그렇게 받아들였다고 생각되지는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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