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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위기의 시대, 누군가는 죽음에 이르는 산업 재해로, 또 누군가는 일상의 삶을 갉아먹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그리고 누군가는 불안정한 노동으로 인한 불안으로 살아가는, 아니 죽어가는 시대에 두 권의 만화가 새로운 사회 운동의 실제적 지반이자 출발점을 그려냈다면 우리는 여기에 내일로 가는 길을 말하는 ‘선언’으로 답해야 한다.



삼성 반도체 공장의 비밀, 그 속에서 백혈병 등으로 죽어간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고통과 분노를 다룬 두 권의 만화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사람 냄새>와 <먼지 없는 방: 삼성반도체 공장의 비밀>을 덮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엉뚱하게도 ‘생활수준 논쟁’이었다.

생활수준 논쟁이란 영국의 산업혁명기에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에서 일하게 된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둘러싼 역사학계의 논쟁이다. 기계제 대공장을 향한 운동을 발진시켰다는 점에서 산업혁명은 이른바 (산업) 자본주의의 산파라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생활수준 논쟁은 학계에서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하나의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심문의 성격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안은 없다”라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논쟁 자체도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계량경제사 분야에서만 불임의 성과가 나오게 되었다.


엥겔스의 책 한 권에서 시작된 '생활수준 논쟁'


이제는 별로 이야기되지 않는 생활수준 논쟁을 꺼낸 것은 사실 이 논쟁의 시작이 엥겔스의 <잉글랜드 노동자 계급의 처지> (1845년)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엥겔스는 개인적인 관찰과 교류, 다양한 자료에 근거하여 당대 프롤레타리아트의 빈곤과 궁핍에 대해 웅변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이런 면모는 마르크스의 <자본> 제1권의 ‘자본주의적 축절의 일반 법칙’과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빈곤과 궁핍에 대한 폭로에 그쳤다면 엥겔스의 책은 탐사 보도에 그쳤을 것이다. 도리어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노동자 계급의 처지는 현재의 모든 사회 운동들의 실제적 지반이자 출발점”이라고 보아서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현존하는 사회적 비참함의 가장 높은, 가장 적나라한 정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두 권의 만화는 우리 시대 노동자 운동의 조건을 드러내는 뛰어난 사회학적 서술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권의 만화로 인해 우리는 흔히 첨단, 청정 산업이라 불리는 삼성 반도체 공장의 작업 조건,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출신과 삶과 노동과 죽음에 대해 대중적인 차원에서 알 수 있게 되었고,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 노동자운동의 조건을 드러내다 <먼지없는 방>, <사람냄새>


물론 두 권의 만화가 뛰어난 사회학적 서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들이 복화술사처럼 황유미, 황상기, 정애정, 황민웅 등 사태의 피해자이자 주인공 뒤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충실하게 전달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 꿈이 좌절되고 배반당했기 때문이며, 이제는 삼성 이데올로기를 좌절시키고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이오”(디킨스, <어려운 시절>)에 그치지 않고, 멜빌의 바틀비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죽음의 병과 죽음 자체는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를 깨닫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거기에 더해 두 권의 만화는 비자금 사건, 경영권 불법 승계 등 삼성 그룹이 노정한 여러 문제를 몽타주로 처리함으로써 우리의 각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여전히 난감하다. 두 권의 만화 곳곳에서 나오듯이 삼성 이데올로기는 사회 구석구석에, 보통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스며든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점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죽음을 넘어서서 나아가면 이 이데올로기가 깨질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두 권의 만화는 소심하거나 추상적이다. 소심하다는 것은 삼성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불법’과 정상적인 기업 경영을 대비하는 데 머물러 있다는 것이며, 추상적이라는 것은 ‘사람 냄새’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른바 인간적인 데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하게 거론하는 것이 작업 환경에 대한 노동자의 알 권리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든지, 법 제도의 개선이 요구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답해야 한다, 고발을 넘어 선언으로


그런데 그러한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물론 삼성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올림’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깨닫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 빚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대답해야 하지 않을까? 삼성 반도체 공장과 같은 비인간적 환경이 누군가의 탐욕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서 탐욕의 구조와 작동을 분석하는 또 다른 사회학적 논의와 정치적 의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위기의 시대, 누군가는 죽음에 이르는 산업 재해로, 또 누군가는 일상의 삶을 갉아먹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그리고 누군가는 불안정한 노동으로 인한 불안으로 살아가는, 아니 죽어가는 시대에 두 권의 만화가 새로운 사회 운동의 실제적 지반이자 출발점을 그려냈다면 우리는 여기에 내일로 가는 길을 말하는 ‘선언’으로 답해야 한다.

[ 안효상 (진보신당 공동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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