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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겨레21에 안효상 노동당 대변인이 같은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이 글의 주소는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814481.html?_fr=mt2입니다.


지난 109일은 쿠바혁명의 주역 중 하나인 체 게바라 사망 5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선 그를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체 게바라는 지난 50년간 국제적 혁명가이자 반항의 아이콘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동시에 그의 반항적 이미지는 종종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차용되기도 한다. 체 게바라의 이미지가 어떻게 확고하게 굳어지고 때론 왜곡되어 왔는지 짚어봤다.

 


1968년 봄 서베를린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에 참석한 서독의 한 여학생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누군가가 그에게 피켓을 주었는데, 그 피켓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나이 든 여자의 사진이었다. 나는 공포에 질린 노파의 사진을 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잘생긴 청년의 사진으로 바꾸었다.” ‘잘생긴 청년은 몇 달 전 볼리비아에서 사살당한 체 게바라였다. 그로부터 5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이 잘생긴 청년 혁명가는 지구촌 곳곳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체 게바라의 사그라들지 않는 인기’, 나아가 컬트 현상의 이유는 여럿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미국의 앞마당에서 쿠바혁명을 이끈 성공한혁명가였고, 동시에 혁명가의 의무인 혁명을 만들기 위해 다시금 게릴라 투쟁에 나섰다 살해당한 실패한혁명가였다. 따라서 그가 목표로 삼았던 혁명, 그 혁명을 수행한 방식, 그리고 그 속에서 저지른 과오를 모두 살펴보지 않고서는 그를 온전히 평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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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똇목 맘보 탱고호를 타고 아마존 강을 내려가는 체 게바라(오른쪽)와 알베르토 그라나도(왼쪽). 위키피디아

 

1928614일 아르헨티나 중부도시 로사리오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가 공산주의 혁명가의 길로 들어선 건 과테말라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글과 영화로 후세에 남은 여행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돌아다니며 대중의 가난, 기아, 질병을 직접 경험한 그는 1953년 말 과테말라로 향한다. 급진적인 아르벤스구스만 대통령이 추진하던 사회개혁에 동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해 여름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후원한 쿠데타로 인해 아르벤스구스만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망명길에 올랐다. 이를 지켜본 체 게바라는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폭력 투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혁명 이후 쿠바 중앙은행 총재 지내

 

이런 인식의 변화에 대해 멕시코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호르헤 카스타녜다는 <동지: 체 게바라의 삶과 죽음>에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식적인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할 때 스탈린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체 게바라는 당시 아주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고 이후 쿠바혁명 과정에서도 자신이 스탈린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그에게 스탈린은 이른바 수정주의적 태도와 대비되는 혁명적 태도를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런 태도는 혁명 수행에서 이른바 전위주의라는 노선으로 나타난다. 나중에 프랑스의 레지스 드브레가 쿠바혁명을 분석하면서 제출한 포코(foco) 이론으로 알려진 체 게바라의 전위주의는 소수의 기동력 있는 무장 그룹이 기존 체제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모아낼 수 있는 초점(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전위주의라 하면, 언제나 레닌이라는 이름부터 연상할 터이나, 근대적인 의미에서는 프랑스 대혁명기의 자코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치에 대한 한 가지 태도이다. 이런 전위주의가 체 게바라와 쿠바혁명의 고유한 특징으로 의미 있게 등장한 배경은 당시 국제혁명운동의 정세와 관련이 있다. 이미 스탈린 시절부터 자본주의/제국주의와 대결하는 노선을 포기했던 소련은 흐루쇼프 시절에 이르러 아예 평화 공존체제 경쟁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무장 투쟁으로 제국주의 세력을 패배시킬 수 있다는 노선이 성공한 건, 이후 제3세계에서 계속해서 여진을 일으킬 커다란 충격이었음에 틀림없다.

 

전위의 출발점은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를 떠올리게 하는 결단이며, 이는 신의 부름이 없는 소명(calling)에 따르는 일이다. 물론 전위가 하는 결단은 대중을 고통에서 구제하는 것이지만, 신의 부름이라는 준거점이 없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다. 이는 이중적 효과를 가져온다. 혁명과 대중에 대한 헌신이 한편에 놓여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전위의 관념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재구성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다. 우리는 체 게바라에게서 누구보다 헌신적인 혁명가의 이미지를 보지만, 현실의 체 게바라는 해당 지역의 구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거나 혁명 과정에서 게릴라 집단을 우선시하고 노동자 계급과 농민을 보조적인 집단으로 보았다. 이런 태도는 혁명 이후사회가 관료제 주도로 구성되는 데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다만 체 게바라의 국제주의와 의지주의가 그를 혁명 이후의 사회에 오래 살지 못하게 했으므로, 그에게 현실적인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체 게바라를 세계 혁명의 아이콘으로 만든 것은 그의 실천적 국제주의이다. 혁명 이후의 쿠바에서 중앙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등을 지내면서 혁명의 공고화를 위해 일하던 그는 1965년 돌연 모습을 감추었다. 그해 10월 카스트로가 공개한 작별 편지에서 체 게바라는 쿠바와 연대감은 지속되겠으나 혁명의 대의를 위해 국외로 떠난다고 밝혔다.

 

그의 작별 편지가 공개된 시간, 체 게바라는 이미 콩고에서 6개월 동안 13명의 쿠바 원정대와 함께 게릴라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질과 심한 천식 그리고 계속된 패배 속에서 그해 11월 콩고를 떠나기로 한다. 그는 이미 작별 편지를 보낸 쿠바로 돌아오지 않고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과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비밀리에 6개월 정도 지낸다.

 

혁명의 환희와 환멸을 완충하는 이미지

 

이후 그가 다시 향한 곳은 라틴아메리카였다. 1966113일 변장하고 가명을 사용한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 도착했다. 며칠 후 그는 동남부 농촌 지역으로 들어가 게릴라 부대 조직에 착수했다. 50명 정도로 이루어진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민족해방군은 볼리비아 정부군과 몇 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볼리비아 정부는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 체 게바라의 게릴라 부대를 무너뜨리려 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은 19678월 일부 게릴라 부대를 전멸시키고 체 게바라를 비롯한 나머지 부대원들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108, 체 게바라는 전투 중에 부상당한 채 정부군에 사로잡혔고, 다음날 오전 처형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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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부대를 이끌던 체 게바라. 위키피디아

 

볼리비아의 투쟁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게릴라 부대가 대중의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포코가 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미국의 개입은 또 다른 중요한 이유다.) 이는 의지주의에 따라 실행한 국제주의의 난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조차 없는 투쟁의 실행은 불가피하게 패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패배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까닭에 체 게바라가 오래도록 헌신적인 국제주의 혁명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를 넘어 어쩌면 역사의 간계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의지주의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새로운 인간’(New Man)의 추구였다. 그는 개인보다는 온전히 사회에 헌신하는 새로운 인간의 창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도덕론자였다고 할 수 있다. 금욕적인 그의 태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새로운 인간의 창조라든가, 사회에 대한 온전한 헌신이라는 것이 가능하고 또 바람직한지는 사실 의문이다. 이는 좀 더 근원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제기한 근대 정치의 원리와 목표인 자유와 평등의 상관관계 그리고 공동체로서 사회의 가치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철학적 수준에서 이 논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자유와 평등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보장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전제로 추락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20세기의 공산주의를 지켜본 우리가 새로운 인간에서 떠올릴 수 있는 계몽의 전제에서 체 게바라가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한편으론 언행을 일치시키려 했던 그의 노력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쿠바 태생의 미국 사회학자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쿠바혁명을 연구한 새뮤얼 파버의 평가처럼 체 게바라가 급진적인 평등주의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파버에 따르면 그의 급진적 평등주의는 보헤미안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데 그 뿌리가 있다고 한다. 그의 급진적 평등주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소탈한 웃음 속에 시가를 물고 있는 장면이나 민중과 함께 노동하는 모습은 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미지가 결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사실과 결합해 반항의 아이콘이미지를 뚜렷하게 형성했을 것이다. 반항의 아이콘이라는 빛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쿠바혁명 직후 아바나의 한 요새 책임자로 있을 때 2천명 가까운 반혁명 분자를 처형한 일과 동성애자를 억압한 사실은 가려져 있다. 그리고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수백만명이 원자탄에 희생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일은 해방의 길을 따라 전진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도 의미를 상실한 듯 보인다.

 

체 게바라가 죽은 후 그를 가장 먼저 우상화한 곳은 당연히 쿠바였다. 아바나의 내무부 건물 전면은 그의 얼굴 윤곽선으로 치장됐다. 그 밑에는 그 유명한 문구 언제나 승리할 때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가 새겨졌다. 쿠바가 점점 소비에트화되어가던 시절 맞이한 그의 죽음은 이런 식으로 혁명의 환희와 혁명의 환멸을 교묘하게 완충하는 이미지로 부활한다.

 

티셔츠에서 라이터까지 장식한 얼굴

 

하나, , 수많은 베트남을이라는 그의 호소에 공명한 1960년대 전 세계 청년·학생의 반란은 그의 이미지를 앞다퉈 차용했고, 또 고양시켰다. 여기에는 이탈리아의 좌파 출판인인 잔자코모 펠트리넬리도 한몫했다. <영웅적인 게릴라 투사>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사진을 원작자인 알베르토 코르다에게 받은 그가 체 게바라가 위험에 빠져 있을 때 포스터로 만들어 배포했던 것이다. 이 사진은 체 게바라가 처형된 이후 나온 <볼리비아 일기>의 표지로도 사용된다. 여기서 체 게바라의 이미지는 제3세계주의 경향과 서구의 반란을 기묘하게 결합시켜준다.

 

죽은 체 게바라에겐 또다른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68운동이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체제 안으로 포섭되면서 체 게바라의 이미지도 함께 상업화의 길을 걷게 된다. 티셔츠는 물론이고 보드카와 심지어 지포 라이터에 이르기까지, 반항적인 이미지의 소비를 부추기는 거의 모든 자본주의 상품에 그의 얼굴이 당당히 차용된다. 물론 이와 동시에 그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는 시도도 계속되는데, 몇년 전 미국의 거대 의류업체가 그의 얼굴이 들어간 티셔츠를 출시하자 인권 그룹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살인자를 영웅시한다고 항의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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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얼굴이 들어간 다양한 티셔츠. 구글 검색 이미지

 

그가 죽은 지 정확히 50년이 흘렀다. 50주기 행사를 앞두고 그가 숨을 거둔 땅인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은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전설은 젊은이들 사이에 살아 있으며, 평등과 해방을 향한 이들의 확고한 투쟁에 살아 있다.’ 그렇다. 체 게바라의 이미지는 앞으로도 쉽게 죽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가 단지 공허하게 살아 있는 데 그치지 않게 하려면 그가 맞닥뜨린 시대적 한계와 오류까지 함께 껴안아야 한다. 중요한 삶의 가치들을 이미 신자유주의란 이름에 빼앗겼을뿐더러 대안은 없다라는 이데올로기가 저들의 가장 큰 무기인 이 시대에, 지향해야 할 가치와 길 찾기를 위한 지도 모두를 되찾기 위해서는 말이다.


안효상 노동당 대변인 (<시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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