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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감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 중요하겠죠”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되어야 했던 사진가, 박정근



인터뷰․정리 :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
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 박정근




박정근은 사진가이자 음악기획자이다. 조광사진관의 주인장이고, 십대 시절부터 마니아 취향의 록 음악을 제작해온 사람이다. 또한 그는 당원이다. 사회당에 입당한 후 진보신당과 사회당의 통합을 통하여 노동당의 당원으로 당적을 이어왔다. 6․4지방선거 시에는 여러 후보자들의 사진촬영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박정근은 유명인사이다. ‘우리민족끼리’의 내용들을 리트윗하고 북한을 찬양․고무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화제를 뿌린 인물이다. ‘한국적 상황’이 낳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2012년 초에 구속된 후 1심에서 유죄, 2심에서 무죄, 그리고 2014년 8월에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박정근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례적으로 이번에는 문답 형식의 글을 싣는다. 성실한 말들을 육성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박정근(사진제공 박정근).jpg

(사진제공 : 박정근)



철거 잔해들을 갖고 놀던 변두리소년, 
비주류 음악과 낡은 사진기와 함께

나도원 : 성장한 동네와 부모님, 특히 사진관을 운영하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청소년 시절의 학교생활과 관심사도 궁금합니다. 

박정근 : 서울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살았던 동네는 이사를 하도 다녀서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은 희미하지만, 개발이 막 시작될 무렵의 길음 뉴타운 근처, 정확히는 정릉과 돈암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고가도로가 없어지는 모습도 보고 집들이 서서히 철거되는 모습을 많이 봤던 것 같네요. 갖고 놀던 것들도 철거 이후의 잔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집도 그렇게 철거가 예정된 집 중 하나였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나선 광진구 근처로 이사해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보냈고, 지금은 강동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져보면 지금 운영하는 사진관은 사대문 안에 있지만 단 한 번도 서울의 변두리를 벗어난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굉장히 활동적인 분이어서 젊어서 스포츠 사진을 주로 찍고 다니셨어요. 사진관을 운영하셨어도 밖에서 찍는 사진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놀러간 곳은 굉장히 많아요. 없는 살림에 스키, 수상스키, 승마처럼 이것저것 시켜보려고 하셨지만 워낙 제 반응이 시큰둥한 탓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별로 강요는 안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운동은 잘 안 해도 밖에 나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걸 아버지가 아셔서 이젠 좀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상황이 바뀐 거죠. 어렸을 땐 조용했지만 좀 겉도는 편이었어요. 남들 안하는 게임하고. 조용히 어디 나가고 고집은 센 편이라 한 번 꽂힌 건 계속 파는 편이었는데, 하필이면 그게 게임이랑 인터넷이었죠. 
학교생활은 별 어려움은 없었어요. 괴롭힘을 당했다거나 싸우러 돌아다니거나 이런 건 없었고, 너무 조용한 편도 아니었고 적당히 말도 안 듣고, 웃긴 구석 있는 친구라고 여겼는지 자연스럽게 지냈죠. 록/메탈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어서 심심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게임을 어느 정도 하는 편이어서요. 중고등학교 때는 게임 잘하는 애들이 아무래도 인기가 많았던 것 같아요.

나도원 : 음악에는 언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고등학생 시절부터 인디레이블들 중에서도 비주류라 할 수 있는 ‘비싼트로피 레코드’를 운영하셨지요. 

박정근 : 원래 이문세 같은 가요를 좋아했고, 메탈리카(Metallica)나 메가데스(Megadeth) 정도의 메탈 밴드는 가끔 듣긴 했지만, 모르는 음악까지 찾아 듣던 편은 아니었어요. 나중에 제 재판에 증인으로 나오기도 한 ‘밤섬해적단’의 권용만이 이 때 쯤에 만화를 그리고 있었어요. 삼류만화라고, 연습장에 끄적끄적 그리는 만화였죠. 거기 보면 메탈밴드들이 조금 나와요. 카니발 콥스(Cannibal Corpse)였나, 이런 것들을 직접 찾아보기엔 인터넷만한 게 없었죠. 그렇게 조금 더 강한 음악을 파고들다가보니 나중엔 같은 반 여자애가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 음반을 생일선물로 주고. 인터넷에서 음악 듣는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만들어진 것이 ‘비싼트로피 레코드’였어요. 
그 당시 멤버들 중에 (밤섬해적단의 멤버이기도 했던) 권용만 같은 경우는 종종 홍대에서 공연을 같이 보기도 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저 사람들은 멋있게 밴드도 하는데 우리는 아직 ‘찐따’구나, 하는 탄식을 하며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갔죠. 하지만 그런 감정이 반작용이 되어서 레이블에 이것저것 더 많은 시도를 해보자 싶어서 조악하지만 음반도 만들어보고 공연도 기획해보자 했던 게 2006년 고3 때였죠.
그런데 함께 만든 사람들이 다들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라 제일 어린 제가 도맡아 하게 되었어요. 막상 운영을 맡게 되니 욕심이 생겨서 이곳저곳에 주먹구구식으로 홍보도 하고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좋은 반응도 있었어요. 이미 클럽에서 공연을 하던 밴드들도 있었지만, 우리처럼 인터넷에서 찌질대고 밴드음악 좋아하던 친구들에게 반응이 있었죠. 그들에게 ‘비싼트로피 레코드’는 뭐랄까, 디씨인사이드 비슷한 곳이어서 게시판 조회 수도 꽤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전자상가에 가서 공시디를 사고 케이스를 사서 첫 번째 컴필레이션 음반을 만들었고, 두 번째 음반은 스트릿펑크밴드 배드 아이돌스(Bad iDols)의 새 EP(미니앨범)이었죠. 덕분에 수익도 생겼고 새로 레이블의 존재도 알리게 되었다가 펑크에 조금 더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죠. 음악뿐만 아니라 언더그라운드 펑크/하드코어의 DIY(Do It Yourself의 준말)에도 관심을 많이 갖게 되어 펑크/하드코어 위주로 바뀌게 됩니다. 첫 공연도 (펑크밴드들의 공연장이자 아지트였던) ‘스컹크헬’에서 가졌고요. 

나도원 : 그러면 사진은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박정근 : ‘비싼트로피’에 한창 열심이었는데, 왼쪽 다리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에 오래 입원해있었어요. 레이블은 접게 되었죠. 큰 수술도 몇 번 하고 장애판정을 받았죠. 병실에 누워서 스무 살을 맞았고 고3일 때도 전혀 대학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었는데 몸져 누워있으니 살 길이 막막하긴 하겠다 싶더라고요. 어머니가 ‘요즘 사회복지사가 괜찮다더라’ 하셔서 양호실에서 대충 수능 쳐서 나온 걸로 서울 2년제 사회복지과에 들어갔는데 너무 재미없어서 1년 다니고 때려치웠고요. 
그 때 마침 일본에서 살고 계시는 고모가 저희 집에 잠깐 묵게 되었는데 선물을 무엇을 받고 싶냐 하시기에 ‘그냥 장롱에 남는 카메라를 한 대 주시라’ 해서 받은 게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시작이었어요. 마침 아버지가 사진관을 하시니 조명이며 카메라며 삼각대며 없는 게 없었죠. 덕분에 사진을 금방 익히게 되었고, 레이소다라는 사진 홈페이지에서 이것저것 올리다보니 또 이 사람 저 사람을 알게 되었죠. 그렇게 먹고살 길을 사진으로 정하자 했는데 집에서 꽤 반대를 하시다가 제가 고집을 부리니 이렇게 살게 놔두셨고, 한동안 이 스튜디오 저 스튜디오 다니면서 일을 꽤 많이 배웠습니다. 
이력서에 쓸 게 많아질 때 쯤 아버지가 이제 사진관에 들어와서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고, 이전까지 다닌 광고스튜디오에 사진관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 뒤에 몇 달 쉬는 동안 만난 게 바로 두리반이에요. 거기서 원래 만났던 ‘밤섬해적단’이며 인터넷에서 봤던 ‘회기동단편선’이며 메신저로만 말을 주고받았던 박다함이며 다 있는 거였죠,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제가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이 친구들은 군대도 갔다 왔고 음악도 더 해보려고 여러 시도를 하고 있었어요. 레이블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사진도 마찬가지였어요. 음악가들을 찍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죠.
 

두리반을 찾고 트위터를 즐기던 청년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시킨 국가

나도원 : 자립음악생산조합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지금은 그들과 조광사진관 겸 자립본부라는 공간을 함께 사용하고 있지요. 

박정근 : 자립음악생산조합은 두리반에서 만나게 되었고 마침 당시 구성원들 대부분 제가 오래 알던 친구들 혹은 이미 이야기를 많이들은 사람들이라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처음엔 레이블을 했던 사람 박정근보다는 사진 찍는 박정근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공연을 하거나 사진이 필요할 땐 제가 있을 때가 많았죠. 그리고 국가보안법 사건이 터졌을 땐 많이 도움을 주기도 했고 항상 SNS에 재판이 있거나 선고가 있으면 공식계정으로 공지를 올려주기도 했어요. 레이블을 새로 시작하면서 제작자, 기획자로서도 조합과 만날 기회가 많아졌고, 레이블을 새로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도 조합원으로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음반제작지원도 조합 차원에서 많이 도움을 받았고, 서로 만날 시간이 많아졌고, 서로의 고민도 대충은 알고 있었죠. 
그러던 중 사진관을 옮기게 되었는데 발품을 팔다가 혼자 하기엔 좀 넓다 싶은 공간을 보게 되어 파트너를 생각해보니 마침 자립음악생산조합 역시 공연장이나 사무공간이 필요했던 상황이어서 지금처럼 공간을 공유하는 형태가 되었어요. 사람이 미어터진 개업식 때에 나눠줄 짜파게티를 하도 많이 끓이는 바람에 화장실에 그 잔해를 제가 치웠던 거랑, 공사를 한참 할 때 서툴렀던지라 장판 바닥에 남은 본드를 제거하려고 조합원들이랑 저랑 신나 냄새를 엄청 맡아가면서 지웠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나도원 : 강동구 암사동에서 조광사진관의 가업을 잇자마자 구속되셨는데, 가족의 걱정이 심했겠습니다. 

박정근 : 어머니나 아버지나 이런 일이 주위에 있었던 적도 없었고, 주위에 운동권도, 수감된 적이 있던 친척들도 전혀 없어서 어안이 벙벙했죠. 삼청교육대 같은 것 아니냐는 생각도 하셨대요. 딱 보이는 압수수색 영장에 떡하니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쓰여 있으니 어머니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으시더라고요. 일단 다행스럽게도 제가 트위터에 이런 일을 겪고 있다고 먼저 말한 덕택에 두리반에서, 명동에서, 당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가게로 찾아와줬고, 그나마 (불행한 일이지만) 주변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거나 겪은 적이 있던 친구들이 부모님에게 설명을 굉장히 잘 해줬어요. 일단은 두 분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설상가상으로 얼마 안지나 저를 애지중지해주셨던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정말 그 땐 힘든 가을을 보냈던 것 같아요. 
구속이 되고 나선 집에서는 어떻게든 제가 일찍 석방이 되길 바라시는 마음에 제게 재판부에 반성문을 써서 보내보아라, 부모님들은 정말 모르니까요, 등의 말을 하셨지만 변호사 두 분께서 제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부모님에게 잘 설명을 해주셨던 것 같아요. 재판을 진행하면서 두 분 역시 이 사건을 이해하시게 되었고, 제가 그동안 했던 일들 가령 두리반에서의 활동이나 레이블 활동도 이해를 하시게 되었어요. 다행스러운 일이죠. 물론 그렇다고 전에 부모님이 제가 하는 일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셨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나도원 : 그렇게 보안사범이 되었다가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40일이나 구치소 생활을 하셨고요. 

박정근 : 이것저것 안 좋은 일들이 겹겹이 많이 쌓여있었어요. 일단은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고 있었죠. 술은 술대로 늘고 걱정은 걱정대로 늘고. 내가 어려운 건 친구들도 알고 있으니 이해는 해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민폐였던 것도 한 둘이 아니고. 변호사님이 제게 언제 ‘사람 하나가 구속이 되면 아무리 인간관계가 안 좋은 사람이라도 최소 다섯 명은 구속된 것과 같은 현상을 겪는다’고 말해줬어요. 당시 제 트위터를 구독하거나 알고 있던 사람들도 상당했는데, 이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생각해보면 끔찍하기도 해요. 주변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물론 지금 많이 괜찮긴 해요. 술도 약도 안 먹고 아직도 약 먹느냐 물어보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약은 구치소에서 끊었어요. 나름 일상으로 돌아가 보려고 술도 좀 줄여보고 해서 지금은 사건 진행되고 있을 때보단 살도 좀 빠졌고요. 다만 생각해보면 20대 중반을 전부 이 송사에 쏟아 부은 꼴이 되는 거잖아요. 이  때가 중요한 것 같은데 실은 이런 큰 일이 끝나고 나니 허무감을 굉장히 많이 느껴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고민이요. 저도 그렇고 이런 공안 관련된 사건의 당사자들이 느끼는, 이 오랜 시간을 쏟아 부었지만 결과가 좋든 나쁘든 결국에 남는 커다란 상실감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단편선과 선원들(사진 박정근).jpg

'단편선과 선원들' (사진 : 박정근)



친구가 없어서 시작한 당 활동? 
연대와 사진으로!

나도원 : 당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실래요? 

박정근 : 간단해요. 친구가 없어서 하게 된 거예요. 저는 원래는 사회당에 입당을 했었고 그 때에는 ‘두리반’에 있었죠. 강의도 많았고, 농담도 많았고, 사건도 많았고, 무엇보다 진보정당에 가입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자연스레 관심이 가기 시작했어요. 물론 두리반 이전에도 집회에 가끔 나가긴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요. 별로 당 활동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도 없었고 강령을 천천히 읽어보고 입당했습니다. 진보신당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도 꽤 많았고요. 사회당 시절엔 포이동에 자주 갔었는데 포이동 같은 경우도 제가 어렸을 때 살던 곳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애당초 관심이 많았던 곳이었는데 기회가 닿아서 자주 오고가곤 했어요. 오히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같은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당에 입당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 쪽이었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그리고 구속이 되고 석방이 된 날 사회당과 진보신당이 통합을 했죠. 혼자 이것저것 다니고 그러진 않았어요. 모르는 것도 많고. 모르는 얼굴들도 많았고 학생운동을 했던 적도 없으니 말이 안 통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고. 명동의 마리나 포이동, 두리반 같은 경우는 친구들이 워낙에 자주 가서 연대활동을 했던 곳이라서 저도 항상 있었고 희망버스도 그랬네요. 

나도원 : 6․4지방선거 때에 노동당 후보들의 사진들을 찍어주셨습니다. 

박정근 :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역활동을 오랫동안 열심히 하고 있었다는 걸 많이 느꼈고, 이렇게 조명도 놓고 사진관에서 사진 찍힐 일이 증명사진 빼면 흔치 않구나 이런 걸 많이 느꼈어요. 사실 선거철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들도 찍고 무소속도 찍고 많이 찍었어요. 물론 노동당 후보들을 가장 많이 찍었죠. 조금 더 시간이 많았다면 좀 더 신경 써서 찍었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각자 활동하시는 분야에 어울리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했는데 그걸 사진가가 잘 끌어냈는가, 이건 아직 잘 모르겠네요.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성심성의껏 찍어보고 싶습니다. 구태의연한 선거포스터랑은 좀 다른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기술만 좋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제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입니다.  


박정근은 최근 발표된 ‘단편선과 선원들’의 《동물》(2014)의 산파이자 음반에 담긴 멤버들의 사진들을 찍은 장본인이다(자립음악가 단편선 또한 당원이다). 보기에 따라선 기괴한 사진들인데, 매끄러운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비가 쏟아지고 날은 어둡고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등 여의치 않은 상황 속에서 작업했다고 한다. 생각과 달리 거친 사진들이 나왔으나 반응은 오히려 괜찮다. 그는 이 음반에 대하여 “굉장히 섬세하고 또렷한 음악”이라며 자랑 겸 칭찬을 이어갔다. 

“제가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Nick Cave & The Bad Seeds)’를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닉 케이브의 초기 밴드였던 더 버스데이 파티(The birthday Party)의 날것 같은 펑크 록이 ‘회기동단편선’이었다면, ‘단편선과 선원들’은 배드 시즈처럼 좀 더 복잡하고 때론 불편한 메시지가 잔뜩 들어있는 트랙과 편하게 누워서 들을 수 있는 트랙들이 함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정말 좋은 작업자들이 모여서 만든 결과물이라서 반응들이 뜨거운 것 같아 뿌듯합니다.”



본 기사의 인터뷰 내용은 <노동당 문화팟캐스트 '컬쳐쇼크' 5회 : 사진가 그리고 음악기획자, 박정근님과 함께>를 통해서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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