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15년 전쯤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이 시작된 뒤부터 가창 리얼리티 쇼가 선풍을 일으키며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지금까지도 이런 쇼들은 엄청나게 인기를 끌고 있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 때문에 노래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위한 사설 교육기관들 역시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보컬트레이닝이라는 취미, 멋들어지게 노래 한 곡 뽑을 줄 아는 능력을 향한 그 ‘간지 나는’ 여정이 삶에 주는 활력소란 실로 클 것이다. 그러나 ‘대박가수’의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낙타 대략 열 마리쯤이 바늘구멍 한 개를 통과할 확률만큼 희박하다. 그 ‘대박가수’의 꿈에서 허우적거리는 수많은 양들을 책임감 없이 유인하는 ‘먹튀’ 구조를 비난하기는 쉽다. 하지만 공급 과잉과 하향세로 인해 수많은 실용음악교육 종사자들이 재정난에 시달리는 지금, 그들을 무작정 몰아세우기도 어렵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래를 만들고 공연을 하는 일을 업(業)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맞닥뜨리곤 하는 일들을 이야기해 볼까 한다.
재즈를 노래한다는 것, 밴드 음악을 한다는 것
“밴드요? 현실을 생각하셔야지. 그냥 MR(‘Music Recorded(반주 음악)’의 약자. 한국 말고는 안 쓴다.) 틀고 노래해 주시면 안 돼요? 요즘 다 그렇게 하는데.”
공연이나 행사 문의가 들어올 때, 밴드 공연을 하겠다고 하면 종종 듣게 되는 소리다. 저 반응 자체만 두고 보면 딱히 언짢거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밴드를 섭외할 때 생기는 상황 변수와 주최 측의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에. 다만, 핵심은 ‘현실’이다. 나는 ‘현실’이라는 말에 함축된 오늘날 한국 음악의 경향성 따위를 오랫동안 곱씹게 된다.
일반적으로 가요나 팝 음악은 전주와 간주 부분이 명확하고 곡 중간에 한 번쯤 클라이맥스가 등장하는 엄격한 구조 안에서 진행된다. 이런 노래를 배우고 싶거나 남들 앞에서 부를 기회가 있을 때 가창의 목표는 대부분 그 가수처럼 ‘잘’ 부르는 것이다. 박정현처럼, 김연우처럼 시원하게 고음 샤우트(shout)를 소화하고, 깊이 있는 저음을 완성해낼 때의 그 희열이란! 이런 경우 트레이닝을 위한 반주로써 MR만큼 편리한 것이 없다.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내 철학이지만, 재즈를 노래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이 경우에는 노래의 중심에 나 자신이 있다. 내가 노래에 맞추기보다 마치 노래가 날 위해 나서 주는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그저 나일뿐 그 어떤 가수가 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래서 재즈에서는 스탠다드(standard)로 규정된 곡의 음역이나 가수의 목소리 톤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템포도, 리듬도, 노래의 전반적인 구조도 본인이 원하는 대로 변형해 부른다. <나는 가수다>나 <복면가왕>처럼 원곡과 다르게 편곡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좀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혹자가 말했던 “똑같은 노래를 백 번 부르면 백 번 다 다르게 부른다”는 얘기에 가깝다고 할까? 신체의 각 기관들이 합심하여 내 현재의 감정과 상태를 오롯이 담아내고, 그것이 소리의 프레이즈로 떠다니게 되니 같은 노래도 부를 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규격화된 반주로서의 MR은 이런 노래를 부르기에 적합하다고 말하기 힘들다.
“MR 반주 안에서도 당신 마음대로 부르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컬리스트와 함께하는 다른 악기들의 소리가 같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가창이 완성되기에 밴드의 존재 역시 중요하다. 현재의 나 자신을 마음껏 발산하는 이기적인(?) 재즈 가창에서 상대 악기들과의 대화는 음악적 자유를 펼칠 수 있는 하얀 도화지와 같다. 그리고 그 도화지 위에서 연주자들 역시 자유로이 자신을 드러낸다. 예상치 않은 보이싱(Voicing: 코드를 이루는 음들을 쌓는 방식)을 선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원하는 만큼의 길이로 솔로(Solo: 곡 전체가 한 번 끝나고 나면 그 원곡의 코드를 가이드로 하여 펼쳐 내는 각 악기의 즉흥연주 부분)에 담아내기도 한다. 이 역시 끝없는 훈련에서 나온 테크닉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즉흥연주의 기본이 되는 테크닉이란 이미 그 전부터 몸속에 희석되어 연주자들의 의지보다 항상 앞서 있는 그 어떤 정체성의 일부이다. 공연 현장에서 순간순간마다 터져 나오는 것은 언제나 연주자의 포괄적인 현재 상태다. 그렇게 연주자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즉흥적인 우연들이 길을 틔우고 흐름을 터주면, 나는 그 길 위에서 노래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인스턴트 음악에 직접 조리 한 스푼
다시 리얼리티 쇼 이야기를 끄집어내 보자면,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명목 하에 그 쇼들에 등장하는 노래의 형식은 요즘 TV 속 얼굴들만큼이나 비슷비슷하다. 짧은 시간 내에 임팩트를 주기 위해 원곡보다 기승전결을 좀 더 명확히 하고, 더 극적으로 편곡 혹은 편집하는 방식을 취한다. 예능 쇼의 특성상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러한 쇼의 음악 형식이 전체 음악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그것이 보편적 취향인 듯 믿게 만드는 미디어의 힘이 새삼스레 조금 두려울 뿐이다.
재즈가, 혹은 내가 하는 음악이 더 진정성이 있다는 자기애에 대한 합리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음악이란 좋음과 나쁨으로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다만 예술과 다른 분야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차이란 성찰 내지 통찰 끝에 나오는 다양성 따위에서 나온다고 믿는 순진한 음악쟁이로서, 컵라면에 물 붓 듯 만들어지는 인스턴트 음악만을 주로 들어야 하는 지금 상황이 불편하다(새우탕이냐 너구리냐 그 맛의 차이는 있겠지만 컵라면이라는 상위 카테고리는 같다).
비단 음악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장르 불문, ‘자기 것’을 하기 힘든 시대이다. 아니, 뭔지도 모를 그 ‘나의 것’을 찾는 시도 자체가 불필요한 시대일지도. 그래서 나 또한 ‘순간의 창작자’로서의 자존감이 쓸데없는 허세로 치부되는 적잖은 상황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가 호흡과 멜로디로 흩어지는 그 찰나가 에고(Ego)의 과잉이 낳은 한낱 ‘가오’가 되어버리고 듣는 사람이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이 역시 자신의 음악 여정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니 좀 더 많은 뮤지션들이 노래를 하고 음악을 만들어 내는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이 되는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다. ‘팔리는’ 음악과 경쟁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조금은 풀려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청자들 역시 온전히 자기 것이 될 ‘나의 취향’을 찾기를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컵라면을 먹은 뒤의 헛헛함을 채워줄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듯이.
‘가수, 재즈, 라이브’를 키워드로 앨범 3장을 소개합니다.
Carmen McRae 《Woman Talk: Live at the Village Gate》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재즈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카르멘 맥레이의 라이브 앨범 중 하나다. 1965년 11월 뉴욕 Village Gate Jazz Club에서 한 달 간 계속되었던 공연 실황이 함축되어 있다. 깊이 있는 톤과 탁월한 레이백(Laid-back), 자신만의 가사 해석 방식이 섞여 맥레이식 재즈 스탠다드가 탄생하는 순간을 엿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FOed4JfXLo
Chet Baker 《One Night in Tokyo》
전설적인 재즈 트럼피터이자 보컬리스트였던 쳇 베이커의 일본 도쿄 공연 실황을 담은 앨범이다. 그가 삶을 등지기 직전이었던 87년 녹음된 것으로, 그의 음악적 커리어는 물론 삶의 후반부 전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만 같다. 절제 속에서의 흥분과 울부짖음을 관조로 감춰 버리는 그의 기민함만큼 고독과 닮은 건 없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rXmh4bl42s
Rachelle Ferrell 《Live In Montreux 91~97》
작곡·작사·편곡가이자 보컬리스트인 레이첼 페렐의 라이브 앨범이다. 91년부터 97년까지 스위스 Montreux Jazz Festival에서의 공연 실황을 한 장에 담았다. 재즈 보컬로 자신을 한정시키지 않는 레이첼은 팝과 R&B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뮤지션으로 유명하다. 전위적인 레이첼의 창법은 가끔 듣는 이로 하여금 감정의 극한에 도달하는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25IsRzi6WRQ
이효정 | 싱어송라이터, 재즈 보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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