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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상담사례 연재는 노동당 당원인 노무사, 노동상담을 하는 활동가들이 노동상담사례를 연재하는 코너입니다. 일단, 최승현, 김민, 김민호, 이병훈 당원이 시작하며, 점점 필진을 늘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미디어 충청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내가 사는 곳에 삼성이 공장을 많이 지은 덕(?)에 2008년부터 백혈병으로 유명해진 삼성직업병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다. 지난 7년 동안 제법 여러 건의 삼성직업병 산재신청사건을 맡았다. 관련 법제도의 개선과 삼성의 입장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 맡게 될 것 같다.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이제 고인이 된 ‘반도체 소녀’ 박지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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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미디어 충청



‘반도체 소녀’가 된 삼성반도체 현장실습생 故 박지연 

2004년 강경상고 3학년 재학시절 동기들과 함께 대기업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온양사업장으로 현장실습을 나간 지연씨는 현장실습을 마치고 삼성에서 계속 일한지 약 2년 만인 2007년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진단받았다. 힘겨운 항암치료와 골수이식까지 했지만 2008년 재발하여 중환자실에서 장기간 투병하다가 2010년 3월 31일 만 23세의 나이로 끝내 운명을 달리했다. 그 무렵 ‘반도체 소녀’라는 제목의 연극이 무대에 오르면서 삼성반도체 현장실습생 박지연은 ‘반도체 소녀’로 다시 태어나 우리 사회에 삼성직업병 문제를 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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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안겨준 근로복지공단 

2009년 5월 15일. 근로복지공단에서 열리는 자문의사협의회에 참석해서 최후진술을 하려고 지연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홀로 이른 새벽 기차를 타고 왔다.그녀의 곁에 대리인 노무사 자격으로 함께 있었던 나는, 그날 근로복지공단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시울이 불거진다. 

항암치료 중에 약해진 몸을 조금이나마 보호하기 위해 하얀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그녀를 처음 맞은 건 자문의사들이 아니라 근로복지공단 건물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는 수백 명의 전경들과 정보과 형사들이었다. 실랑이 끝에 건물 안으로 들어갔지만, 근로복지공단 직원 수십 명이 자문의사협의회장 문 앞을 막아섰다. 격렬한 몸싸움 끝에 자문의사협의회장에 들어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회의장에는 자문의사들과 보상부장, 담당직원 그리고 10명가량의 사람들이 굳은 자세로 도열하여 공포스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회의장에 들어오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잔뜩 겁에 질려있던 그녀는 회의장의 분위기에 주눅 든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취조실 같은 자문의사협의회를 처음 접한 나 역시 당황했다.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내보낼 때까지 최후진술을 거부했다. 

그렇게 대치국면이 이어지자, 빨리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고 싶은 몇 몇 자문의사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그때서야 근로복지공단이 도열해 있던 사람들을 내보내고 회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자문의사협의회는 실망과 분노를 안겨 주었다. 그동안 제출된 서면과 증거들을 회의장에 와서야 접한 자문의사들에게 애당초 심도 깊은 회의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밤새워 정성껏 자필로 써 내려간 최후진술문을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떨리는 목소리로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고인에게 어느 자문의사가 한 말 때문이었다. 

‘여기 자료에 다 있는 내용이니까 짧게 진술해 달라, 당신도 노동자지만 나도 병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당신도 환자지만 병원에서 나를 기다리는 환자들도 있다.’ 

박지연씨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수록 감정을 가라앉히고 산재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차분히 자문의사들에게 업무관련성에 관한 주장을 어필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 대리인 노무사로서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까? 그렇게 짧은 순간 망설이다가 그러는 사이 눈물로 흠뻑 젖은 그녀의 마스크를 보고 문득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필요한 건 냉철한 노무사가 아니라 어쩌면 백혈병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안겨준 근로복지공단에 항의해 줄 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그날 노무사이길 포기했고, 결과는 업무관련성이 있다는 의견 2명, 업무관련성이 낮다는 의견 3명으로 아깝게 불승인되었다.

혹자는 그날 노무사로서 나의 선택이 달랐다면 아마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날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날 이후 투병 끝에 결국 운명을 달리한 고인이 남긴 유지에 어울리는 행동이었다고 믿고 있다. 

고인은 무척 살고 싶어 했지만, 스물셋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삼성은 그녀에게 ‘산재신청을 취하하고 사회단체와의 연락을 끊으면 치료비 걱정없이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러한 회사의 회유에 굴하지 않았고 병이 재발하여 죽음의 문턱에 임박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 황유미씨 유족 등과 함께 삼성백혈병 행정소송을 제기한 5명의 원고 중 한 명으로 함께했다. 안타깝게도 고인이 죽은 뒤 유족은 더 이상 소송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고인의 5주기를 맞이하여 지난 3월 31일 또 다른 ‘반도체소녀’의 산재신청서를 바로 그 근로복지공단에 접수했다. 



[ 김민호 노무사(충남비정규직지원센터/노무법인 참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labor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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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씨의 생전 모습 (사진 미디어 충청)



<고 박지연의 약력>
 
- 1987년 출생
- 2004년12월, 강경상고 3학년 재학 중 삼성전자 온양사업장 오퍼레이터(생산직)로 입사
- 1라인(공장) 여러 공정(특히 몰드공정)을 돌며 화학약품, X선을 이용하여 반도체 검사
- 2007년 9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 (투병 생활 시작 - 항암치료 4회)
- 2008년 4월, 골수이식
- 2008년 4월, 반올림을 통해 집단산재신청 후 투병 중 반올림 활동 참여
- 2009년 9월, 백혈병 재발
- 2010년 3월 26일, 급격히 악화되어 서울성모병원 중환자실 입원
- 2010년 3월 31일, 오전 10시 55분 운명 (당시 23세)
- 2010년 4월 2일, 속초 앞 바다에 뿌려지다.
 


<故 박지연 씨 최후진술문>
 
저는 2004년 12월 27일 온양반도체에 입사하여 2년 8개월간 QE그룹이라는 검사과에서 일하다 급성골수성백혈병(MI)이라는 암에 걸려 2년째 투병중인 피해자 박지연입니다.
 
입사한지 2년 8개월만인 2007년 9월 12일, 21살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5번의 항암치료를 받아 2008년 4월 29일 골수이식을 어렵게 받았습니다. 이식 후 합병증으로 응급실을 3번이나 갔을 정도로 위엄한 상황도 있었지만 고비는 넘겨 이식한지 1년이 지난 지금 2주에 한번 서울성모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 1년여 동안 병원비로만 수 천만원을 썼고 어려운 형편에 부모님께 효도해 보고자 대학교 포기하고 삼성이라는 대기업에 취업했지만 3년도 안 돼 저에게 돌아온 결과는 티비 드라마에서나 나오던 백혈병이라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건강했던 제가 하루아침에 생사를 넘나드는 병에 걸렸다는 게 꿈만 같았고 삼성을 선택한 제가 원망스럽고 후회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한참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충격을 더욱 컸고 감당하기조차 힘이 들었지만 주위사람들의 격려와 엄마의 지극한 정성과 보살핌에 꿋꿋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제가 몸담아 일했던 곳은 1라인으로 Dram Front 공정으로부터 mold, finish, gate, test공정까지 location을 돌아가며 조립, 검사공정에서 제품의 와관검사 및 x-ray검사, finish공정의 품질실험특성검사인 도금접착성 실험 등 제품의 불량유무를 검사하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mold공정에서 x-ray검사가 업무 중 비중이 제일 컸고, 더군다나 x-ray설비는 10년이 넘은 노후설비라 안전장치 등 잠금장치조차 없어 바쁘게 일하다 보면 설비가 켜져 있는지도 모른 채 문을 열고 닫고 작업했던적도 많았습니다. 

finish공정에선 도금공정이 끝난 lead frame 자재를 낱개로 잘라 bake oven 2hr, steam aging 8hr 넣어놓은 후 flux라는 끈적끈적한 노란색 접착제 역할을 해주는 약품에 담구었다가 245℃의 녹아있는 납에 담구어 솔더(납)을 입혀 제품에 솔더가 잘 입혀졌는지 테스트하는 도금접착성 검사를 했습니다. 솔더가 입혀지면 세척제 역할을 하는 141B약품에 담근 다음 SCOPE검사를 하는 작업을 수없이 했습니다. 납에 제품을 담글 때 하얀 연기가 나는데 그 연기는 코로 바로 흡입이 돼서 역겹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며 flux용액과 141B용액을 교체하며 다루는 과정에 화학약품이 손에 묻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장갑이라고는 면장갑을 착용했지만 약품이 그대로 손에 스며들었고 물로 씻어도 약품이 남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거의 마스크를 하지 않았고 실험 시 필요한 안전보허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solder pot장치의 연기가 빠져나가는 후두에서 불이 난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일하며 건강만 잃고 제 인생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려 지금은 부모님께 불효자식이 되어서 큰 상처만 남긴 채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에 진단을 받았던 병원 교수님께서 화학약품을 다뤘냐고 질문을 하셨으며, 주위에 유산을 경험한 동료도 있었고, 병이 나기 몇 달 전 생리불순은 물론 하혈을 하여 방진복에 피가 묻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4조 3교대가 원칙이지만 사실상 2교대 근무에 2주 연장 야간 일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면역력이 저하되고 방사선과 화학약품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업무상 질병으로 충분히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산업재해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향후 5년을 바라봐야 완치가 되는 병이라고 하는데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며 살아가야 하고, 재발이 되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치료할 비용도 없을뿐더러 밥벌이도 못하고 이대로 병원비, 약값으로 엄마가 식당일로 벌어오는 생활비를 쓰기만 한다면 생계유지가 안될 것 같고 살수가 없을 것 같아 앞으로 불편한 몸 이끌고 답답한 마음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더 이상 저와 같은 병에 걸리는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앞으로 제가 병원비, 생활비 걱정만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근로복지공단은 치료비보상과 생존권 보장을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2009년 5월 15일

(천안지사 근로복지공단에서) 자문의사협의회 中 박 지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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