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만난 사람들
참을 수 없는 공권력의 가벼움
밀양에 다녀온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다. 어쩌다가 희망버스에 탑승하게 됐을까. 나의 경우엔 순전히 “안녕들”이 탄 희망버스 한 대를 편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왜 “안녕들”이 희망버스를 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대자보를 통해 밀양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모종의 당위가 있다고 해서 밀양으로 가(게 하)기 위한 과정이 손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박 2일의 “단기집중연대”가 가지는 한계를, 1차 밀양 희망버스 이후 유한숙 어르신의 죽음이 지시하고 있었다. 너무 늦게 버스 편성 제안이 이뤄진 탓에 얼마나 사람을 모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 행보의 ‘정치적 효과’에 대해 고려해야 했으며, 보수적인 예산 책정에 맞서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다른 당위와의 충돌 혹은 현실 논리의 개입에 불평하는 일은 의미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해가 되었다. 어느 때보다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절실했고, 이것이 당위나 과정만큼이나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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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으로 향하는 버스안에서 故 유한숙 어르신을 추모하는 하얀 종이꽃을 만드는 중. (사진: 백야) |
출발 당일 아침 서른 명이 넘는 “안녕들”이 밀양을 향해 출발했다. 버스를 꽉 채울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무사히 한 버스에 탑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단 안도했다. 이 때부터는 개인 참가자의 마음으로 편안하게 일정을 소화했다. 노동당 학생당원으로서의 자기소개도 빼놓지 않았다.
밀양에 도착해서는 일정이 빼곡하게 진행되었다. 꽤 길고 고됐던 시가행진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기존 정치 조직/단위가 아닌 “안녕들” 참가자들이 꽤 단합된 모습으로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었다. 8박자 구호, 텔레비전 구호 등을 속성으로 배우고 현장에서 합을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안녕들” 대오는 노련하게 주변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우리들이 밀양이다!”
“송전탑건설 중단하라!”
“핵발전소 필요 없다!”
“우리 모두 함께 살자!”
"언제까지 이렇게만 당하지는 않을 거야!“
“바꾼다네 바꾼다네 내 손으로 바꾼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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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시내를 행진하며 선전활동을 펼치는 백야와 '안녕들' (사진: 박혜림) |
이제 막 활동가 흉내를 낼 수 있게 된 사람으로서는, 이 생생한 동력을 어떻게 지속 가능한 운동의 영역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만큼이나 조직을 가진 이들의 조직된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 소속 없이 해 왔던 지난 운동에서의 배움이다. 수많은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개인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담보해주는 것은 주변의 동료와 그가 속한 조직이다. 더 나아가 “당신의 로두스가 왜 노동당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도 해명할 수 있어야 하리라.
다음 날 아침에는 감물리의 송전탑 공사장으로 향했다. 희망버스 기획단으로부터 아무런 사전 지시사항은 없었지만,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른 단위에서 온 사람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기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경찰의 블로킹이 시작되었다. 막아야 할 공사장이 한둘이 아니고 막아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닐 텐데 어느 구멍에서 그렇게 많은 경찰이 나오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두목도 지령도 없는 오합지졸들의 여정은 험난했다. 생판 처음 와보는 산동네인데다 공사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게다가 그 곳에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공사장에 가는 걸 막는’다는 단 하나의 목표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수많은 경찰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대오는 분리되거나 고립되기 일쑤였다.
경찰은 송전탑 공사장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길이 아닌 곳으로 갈라 치면 길이 아닌 곳에 따라와서 막았다. 경력이 부족하면 경력을 충원해서 막았고 아래가 뚫리면 위로 가서 막았다. 왜 “저렇게 하면서까지” 공사를 강행하려 하는지, 어떤 거창한 이유를 갖다 대도 모두 설득력이 있을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렇게 사활을 걸고 송전탑 공사를 엄호하는 것이 바로 “공권력”이기에, 온 산을 다 막고 사람들을 못 드나들게 막는 촌극은 가능했다. 106번 부지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공권력 행사의 근거에 대해 묻고 관등성명을 요구했지만 단 한 명의 경찰에게서도 그 이유와 소속, 이름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이 올라갈 수 없게 막으면서 “내려가시라” 하는 말이 실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인 것처럼, 공권력의 행사가 기본적으로 정당하되 예외적으로 부당하다는 인식은 허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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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들의 공사현장 진입을 가로막는 경찰병력 (사진: 백야) |
경력의 블로킹을 돌파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한 나이 지긋하신 동네 주민 할아버지는 비탈진 바위들 틈에서 경찰에 막혀 어쩔 줄 모르는 우리 일행과는 달리, 경찰 대여섯을 쉽게 따돌리고 심마니와 같은 빠른 발걸음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연대하러 밀양에 온 것 같은 한 아저씨는 도망과 설득 스킬을 병용하고 있었다.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치다가 실패하면 “자 우리 이성적으로 대화를 좀 해 보자. 내가 저 위로 올라가지는 않겠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네가 나를 위해 타협을 해 줘야지. 최소한 이 옆으로는 지나가게 해 줘야 하지 않겠냐?”는 둥의 썰을 풀며 숨을 고르다가 경찰이 한 눈을 파는 틈을 타 다시 도망을 시도하는 그런 식이었다.
꽤 많은 실랑이와 몸싸움을 거쳐 우리 일행 중 예닐곱 정도가 겨우 106번 송전탑 부지에 도착했다. 심마니 포스를 풍기며 유유히 사라지셨던 할배를 그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약식집회에서 할배의 발언은 연대한다는 것에 대한 많은 뼈아픈 고민을 던져주었다. 사람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노라고, 당신들 덕분에 오늘 공사는 중단되었다고. 그러니 나와 함께 오늘 밤새 이 곳을 지키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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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저녁, 문화제가 끝나고 모여서 기념촬영을 하는 '안녕들' (사진: 박혜림) |
수 천 명이 밀양역을 연대의 촛불로 환하게 밝히거나 단 하루라도 송전탑 부지를 끝까지 오르면 밀양의 투쟁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 하룻밤 하고 이틀의 밀물과 썰물은 그저 무용하거나 오히려 독이 될 것이라는 비관. 그 사이 어딘가에서 꿈틀대던 분노와 의지들이 앞으로의 밀양 싸움에 큰 횃불이 되길 바란다.
[ 백야 (노동당 당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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