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이슈 / 뉴스

사랑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께.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을 여러분께서 읽는 시점에 저는 이미 대표직을 내려놓고 평당원으로 되돌아와 있을 것입니다. 어제(10월 27일) 전국위에 모인 동지들 앞에서 이미 사퇴의 뜻을 밝혔습니다만, 저를 대표로 뽑아주셨고 당 대표로서 능력이 부족한 저를 끝까지 애정 어린 마음으로 대해주셨던 당원 동지 모두에게 대표로서 작별의 인사를 드립니다.

a09bac67fbde02ca045726505bcb6b26.jpg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라는 글을 올리며 대표로 나선 게 지난해 10월 26일이었으니, ‘더도 덜도 아닌 1년만 대표가 되어 후배들의 울타리가 되어 달라’던 누군가의 권유가 마치 정확한 예언이 된 것처럼 꼭 1년 만에 물러나게 되었네요. 뭐라 소회를 밝힐 수 있을까요? 달아나고 싶어 황망히 서울을 떠났다 되돌아왔던 1년 전에 비해 지금 상황이 달라진 게 없고, 아니 그때보다 인간적 삶의 조건은 물론이거니와 좌파정치를 둘러싼 현실은 위기의 상황이 깊어지고 있으니 안타까움과 회한으로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혹여 제가 대표가 된 게 당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다른 진로의 가능성을 가로막은 건 아닌가 하는 따위의 자책은 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당의 울타리 안에서 만났고, 그래서 우리가 함께 부딪히려 했고 또 맞닥뜨려야 했던 상황의 이면에 있던 필연의 맥락을 찾아내어 스스로를 다독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분이 대표로 여겨주었던 제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이라고 믿으니까요.

진보정당의 대표가 된다는 것, 제게 이보다 더 낯선 우연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저를 잘 알고 있는 가족들은 이 ‘사태’를 처음부터 의아하고 무모한 선택으로 여겨 무척 당혹해했습니다. 저의 “상황의 부름에 응답하려고”라는 설명은 투병중인 아내에게 오래된 악몽을 되살리게 했습니다.

본디 열정적 의지도 숫기도 부족해 앞에 나서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댔던, 중앙 무대의 주연이 되기를 꿈꾸어본 적 없는, 이를테면 소심한 서생으로나 살아가는 게 적당했을 저를 우연성의 파고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귀국한 뒤로 진보정당의 당원이 되었고, 때로는 당원의 신분을 불편해 하는 시선 속에서도 마음 속 긍지 하나는 포기할 수 없었던, 그러다 귀국 10년의 마지막 해에 예기치 않은 역할까지 자처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hsehwa_05.jpg

이는 두고두고 반추해 보아야 할 제 삶의 숙제이지만, 이것 한 가지만큼은 이 마지막 편지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다시 확인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여기 남아 있게 하는 것은 진보정당이라는 틀 그 자체가 소중하고 지켜야 할 무엇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보를 자처하는 정당이라면 이 시대의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결코 멀리 떨어질 수 없으며, 내면의 의식과 존재의 양식이 권력의지와 체제의 가치에 포섭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점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떠나고 누가 남았는가는 근원적인 문제가 아직 아닐 수 있습니다. ‘남은 자’들을 자처한 우리도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사회적 파국과 삶의 위기를 수수방관하는 무기력한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가? 아직 우리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국내에 출간될,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쎌의 새 책 『분노한 사람들에게』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던 공언들이 세상은 안 바뀌었는데 자신만 (세상의 일부로) 바뀌는 현실로 둔갑하는 상황으로부터 우리는 과연 예외일 수 있을까요? 아니 우리는 이 모순된 상황을 자각하고 응시하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것일까요?

당원 동지 여러분.

1년 전 대표로 나서면서 저는 진보신당을 ‘싸우는 정당’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현실정치의 경험이 없는 제가 미력이나마 당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 하나라고 생각했던 때문이지요.

좌파는 어디에 존립하는가? 인간의 고통에서 비켜선 채로, ‘다른 미래’를 앞당기려는 의지를 포기하고서 좌파가 존립해야 할 이유가 없는 까닭에 저는 이 질문에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야기하려면 우리가 누구와 싸우는지, 다시 말해 우리의 적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싸움을 통해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적이 인간 현실에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는지를 드러내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더불어 우리 자신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어도 정치조직으로서의 당이라면 현실적 투쟁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 제시할 책무가 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지금 한국사회를 넘어 근원적 위기로 요동치는 자본의 세계에서 누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를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제가 곧잘 이야기하는 ‘배제된 자’라는 표현은 누군가의 지적처럼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본으로부터 버림받고, 관료화되거나 물신에 포섭된 노동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이중으로 배제된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좌파정치의 새로운 시작이 되어야 하고, 이 경계에 대한 공동의 인식이 조직노동을 포함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이에 기초하여 우리 당은 지난 총선에서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김순자 후보를 비례대표 1번으로 하는 ‘배제된 노동의 서사 전략’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20121029155827_0902.jpg

ⓒ 미디어오늘

다가오는 대선에서 ‘사회연대를 위한 대선공동대응’ 방침을 세우려했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다소 단순화시키고 거칠게 말한다면, 저는 이번 대선에서 진보신당이 살아남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절박한 과제는 노동을 포함한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정치과정에 있다고 믿습니다. 배제된 노동을 새로운 정치주체로 등장시키는 것을 핵심 과제로 상정하는 주체형성과정 말이지요. 설혹 그 과정이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머지않아 눈앞의 현실이 될 한국자본주의의 파국 앞에서 자본의 전면 공세에 저항할 무기는 사회적 연대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공동대응이냐 단독대응이냐, 무소속 등록이냐 진보신당 후보냐, 그간 당내에서 분분했던 논의들을 새삼 들추어낼 생각은 없습니다. 왜 서둘러 공동대응 방침을 철회하려 했는지, 공동대응을 둘러싼 당 안과 밖의 인식과 접근방식의 차이는 극복될 수 없을 만큼 본질적인 것이었는지, 하는 회한도 마음속에 묻어두고 이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제가 지려 합니다. 이 좌절로 인해 당원 동지들에게 안겨준 실망과 무기력함에 대한 깊은 사과와 함께. 특히 방금 제가 한 말들이 다른 생각과 입장들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정치조직 내부의 차이는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해야 하며 이를 보다 높고 섬세한 수준의 통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리더의 존재이유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저의 어설픈 이상주의와 정당정치의 현실을 헤쳐 나갈 능력이 부족했던 한계에 그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우리 내부의 상처를 다스리고 서로 다른 차이들에 대한 열린 마음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우리에게는 감격을 가져다주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과거 사회당 동지들의 결단으로 그토록 실현되지 않던 통합을 이루어내어 함께 통합 당 대회를 가졌던 순간, 인간다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본의 정치는 물론이고 엉터리 진보정치를 분리수거해야 한다고 외치던 김순자 후보의 사자후를 듣던 순간, 무엇보다 총선의 초라한 성적으로 인해 정당등록이 취소된 이후에도 당을 떠나지 않은 동지들의 존재, 이 모두가 제겐 감격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저의 책무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지만, 동지 여러분은 더 이상 좌절하거나 실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 대표들이 모두 이탈한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남아 당을 지켜온 여러분들입니다. 어떤 당의 당원들에 비교될 수 없는 자존감을 지니고 있고 고통 받고 싸우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연대해온 사람들이 여러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깊은 신뢰를 보냅니다.

“인간은 나비로 변신할 수 있는 애벌레와 비슷하다. 분노하지 않는 한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라는 에드가 모랭의 말이 이번에 읽은 스테판 에쎌의 책에 인용되어 있더군요. ‘가난한 자들이 있는 한 유토피아는 존재한다’는 구절도 어디엔가 눈에 띄었고요. 한 저널리스트가 올해로 94세가 된 스테판 에쎌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매일 아침 세계의 모든 일에 끼어들어, 때로는 매우 선동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당신을 몰아가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앞서의 에드가 모랭의 말은 에쎌이 ‘인간의 마음’을 강조하며 인용한 것이지요. 상호의존성을 발견하고, 공감하고, 연대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사회연대나 공동대응의 가치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한, 방법의 차이를 넘어선 새로운 연대의 길은 아직 우리 앞에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이 기적이듯이, 우리 자신을 해체할 용기를 지님으로써 더 큰 우리를 형성하는 길이 있다면, 여러분은 주저 없이 그 길로 나아가 주십시오.

20121029155738_3044.jpg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기에 우리가 가야 한다’고 버릇처럼 이야기하던 바로 그 말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던 까닭에 서툴기만 하고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대표라는 직책을 맡은 지 1년 만에 무거운 직책을 내려놓고 평당원으로 돌아갑니다. 더 자주 다가가 손을 잡고, 더 많이 다가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 그게 가장 죄송했다는 말씀을 빠트릴 수 없군요. 이 길이 여러분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속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므로 제가 진 빚은 두고두고 갚을 생각입니다. 부디 평당원 홍세화를 너그러이 받아주시길...

홍세화 드림.

[ 홍세화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laborkr@gmail.com
서비스 선택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1. '빨간 날' 유급휴일 법제화 해야

    '빨간 날' 유급휴일 법제화 해야 모든 노동자가 평등하게 쉴 수 있는 나라 ▲ 신동열 - 노동당 경기도당 위원장 무한도전 달력의 사전예약이 실시되는 것을 보니 벌써 연말이 코앞이다. 이맘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새해에 대한 설계와 함께 내년에는 '빨간...
    Category컬럼
    Read More
  2. 목영대, 뉴타운을 뒤집다⑤ 시장도 시의원도 등 돌리고

    전국을 몰아쳤던 뉴타운 개발의 광풍은 권력자들과 토건족들의 이익을 위해 서민들의 피와 눈물을 짜냈다. 노동당 당원들은 전국 각처에서 이 터무니없는 사업에 반대하며 서민들의 주거권과 생존권을 위해 앞장서 싸웠다. 그중에서도 의정부 뉴타운 반대투쟁...
    Category컬럼
    Read More
  3. 목영대, 뉴타운을 뒤집다④ '뉴타운 사기극'의 민낯을 보여드립니다

    전국을 몰아쳤던 뉴타운 개발의 광풍은 권력자들과 토건족들의 이익을 위해 서민들의 피와 눈물을 짜냈다. 노동당 당원들은 전국 각처에서 이 터무니없는 사업에 반대하며 서민들의 주거권과 생존권을 위해 앞장서 싸웠다. 그중에서도 의정부 뉴타운 반대투쟁...
    Category컬럼
    Read More
  4. 목영대, 뉴타운을 뒤집다③ 보수정치인의 욕망과 뉴타운이라는 괴물의 탄생

    전국을 몰아쳤던 뉴타운 개발의 광풍은 권력자들과 토건족들의 이익을 위해 서민들의 피와 눈물을 짜냈다. 노동당 당원들은 전국 각처에서 이 터무니없는 사업에 반대하며 서민들의 주거권과 생존권을 위해 앞장서 싸웠다. 그중에서도 의정부 뉴타운 반대투쟁...
    Category컬럼
    Read More
  5. 까치집 위에서 까치설날 맞이하는 노동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당원동지여러분! 우리의 고유명절 설입니다. 안전하게 귀향들 하셨는지요? 저는 오랜만에 어머님과 형제들이 모여 음식도 만들고 이야기꽃도 피우고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천안중앙시장에 들러 몇 가지 제수용품을 사기도 하고 인사차 친척집 몇 집도 들...
    Category컬럼
    Read More
  6. [홍세화] 사퇴의 글

    사랑하는 당원 동지 여러분께.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을 여러분께서 읽는 시점에 저는 이미 대표직을 내려놓고 평당원으로 되돌아와 있을 것입니다. 어제(10월 27일) 전국위에 모인 동지들 앞에서 이미 사퇴의 뜻을 밝혔습니다만, 저를 대표로 뽑아주셨고 ...
    Category컬럼
    Read More
  7. [홍세화] 우리는 기어이 되돌아가야 한다

    왜 다시 전태일을 호명해야 하는가 나는 왜 쓰는가? ― 4년 전의 글을 다시 꺼내 읽으며 일주일 전쯤, 20대의 한 청년 당원이 들려준 이야기 하나가 이 글을 시작하려는 지금 다시 내 마음을 짓누른다. 동네 가게 주인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고 했다. “선거 때 ...
    Category컬럼
    Read More
  8. 목영대, 뉴타운을 뒤집다② 의정부 뉴타운 반대운동, 그 늪에 빠지다

    뉴타운, 단지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아냐 전국을 몰아쳤던 뉴타운 개발의 광풍은 권력자들과 토건족들의 이익을 위해 서민들의 피와 눈물을 짜냈다. 노동당 당원들은 전국 각처에서 이 터무니없는 사업에 반대하며 서민들의 주거권과 생존권을 위...
    Category컬럼
    Read More
  9. 목영대, 뉴타운을 뒤집다① 최후 변론

    뉴타운은 해제됐지만…주민 7명 기소되고 벌금 구형받아 전국을 몰아쳤던 뉴타운 개발의 광풍은 권력자들과 토건족들의 이익을 위해 서민들의 피와 눈물을 짜냈다. 노동당 당원들은 전국 각처에서 이 터무니없는 사업에 반대하며 서민들의 주거권과 ...
    Category컬럼
    Read More
  10. No Image

    흘러야 강이다⑥ 4대강 '사업'을 넘어

    단순한 처벌이 아닌 단죄(斷罪)가 필요한 때다 노동당 온라인 매체 <사랑과 혁명의 정치신문 R>에서 4대강 사업의 그늘을 재조명합니다. MB는 갔어도 4대강사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천 전문가이며 ...
    Category컬럼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25 Next
/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