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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 역사 알기 | 노동자역사 한내 | 한내 | 2015년 11월 | 65,000원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진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


몇 년 전 형네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두꺼운 사진책을 보았다. 기억이 맞다면, 이태리 노동총연맹(CGIL)에서 이태리 노동운동 관련 사진을 모아 낸 사진집이었다. 자본주의 초창기 공장에서 일하는 아동노동자로부터 시작해 그 유명한 1969년 ‘뜨거운 가을(autunno caldo)’과 FIAT 금속노동자들의 파업, 이태리 공산당 당대회에 이르기까지, 글자로 익혔던 이태리 노동운동사의 중요한 국면들이 불뚝불뚝 생생하게 다가왔다. 빛나는 노동운동사를 만들어 나간, 아니 그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해 대대로 함께 나눠보는 이태리 노동운동의 저력이 부러웠다.
지금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노동운동 역시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 못지않게 빛나는 투쟁의 역사와 성과를 만들어냈다. 70년대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산업의 지리적 재편과 분업 조정을 거치면서 가치사슬의 맨 아랫부분을 담당하던 한국, 브라질, 남아공 등 제3세계의 노동자들이 저항의 불꽃을 터뜨렸다. 이러한 노동운동 후발주자들의 빛나는 분발은 ‘사회운동적 조합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 흔적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도약’을 하나의 법칙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사전적인 법칙을 절대시할 필요는 없겠으나, 역사 공부와 서술에 있어서는 정말 딱 들어맞는 서술이 아닐 수 없다. 풍부한 사료와 다양한 관점은 지나간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리고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내 마음을 모르는 게 당연하듯이, 사료와 관점이 없으면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알 수가 없다. 빛나던 투쟁의 역사는, 정신은, 감동은, 자부심은 드러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노동운동사는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리는 영아사망의 상태나 다름없다. 투쟁은 계속 생겨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5년만 지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관련 자료는 고사하고 날짜라도 찾고 싶어도 찾을 방법이 없다.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에게 역사가와 역사를 기록하는 아키비스트(archivist)들은 잘 차려진 밥상에 한낱 숟가락 하나 얹는 사람들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부심만으로 켜켜이 쌓여나가는 세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금 여기서 그때그때 해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흘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물의 누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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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한 모든 이와 투쟁한 노동자가 함께 만들어낸 역사의 기록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노동자역사 한내’가 그나마 한국 노동운동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우리 노동운동이 걸어온 120년 역사를 담은 사진들을 모아 두꺼운 사진집을 낸 것이다. ‘노동자역사 한내’는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의 역사를 담은 『전노협 백서』를 만들던 故 김종배 동지(모란공원 묘역에 그의 묘소가 있다.)의 정신을 받아 안아 노동운동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80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조직노동이 해야 할 역할을 ‘외부세력’이 하는 셈이다.
이 책의 제목은 『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알기』로 되어있지만, ‘노동자역사’보다는 ‘노동운동의 역사’에 대한 사진이 주를 이룬다. 한 노동자의 삶은 투쟁만으로 점철되어있지 않다. 오히려 ‘투쟁’은 삶 전체에서 보면 짧은 예외적 시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진집이 한국 노동자들의 역사를 오롯이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응축된 분노를 표출하는 그릇이고, 그 응축된 분노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이 사진이다. 사진을 ‘찰나의 예술’이라 부르는 건 그래서 적절하다. 잘 포착한 한 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감동의 깊이와 압축된 설명은 열권의 책 못지않다.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80년 4월 ‘사북사태’로 불리던 사북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투쟁 사진이나 1971년 KAL빌딩에서 체불임금 투쟁을 벌이던 파월 한진 노동자들의 투쟁 사진은 아무리 꼼꼼하게 한국 노동운동사에 대해 공부하더라도 알기 힘든 현장감과 당사자들의 심정을 포착해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이 사진집에 실린 사진 중에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경향신문과 같은 오래된 신문사들의 사진도 있고, 원풍모방 박순희 부지부장이나 동일방직 이총각 지부장과 같이 당사자들이 제공한 사진들도 있다. 또한 민주노총 『노동과 세계』 같은 기관지 기자들의 사진들도 있다. 사진을 남기고 기록한 모든 사람들, 그리고 눈물과 분노 속에서도 투쟁한 모든 우리 노동자들의 노력이 한 권의 사진집을 만들었다.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내는 다른 주요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11월에 발간되었다. 아마도 우리 노동운동의 뿌리, 전태일 열사가 그 달에 산화했기 때문일 테다.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른다 한다. 우리의 역사를 기록하는 책들이 한 권 한 권 쌓일 때마다 우리는 진정으로 영원히 ‘모두 다 사라지지 않게’ 되리라 믿는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의 무게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6만5천원이라는 책값이 비싸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개개인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제안을 한다면, 노동조합도 좋고 사회단체도 좋으니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이 책 한 권씩 구매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자기 동네 공공도서관에 회원가입을 하고 희망도서 신청을 해주면 좋겠다. 나 역시 창원의창도서관, 부산금정도서관, 영등포평생학습관에 책 신청을 했다. 그 정도 노력이야 할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지난 9월27일 민주노총 편집국과 금속노조 편집실에서 일하던 이정원 동지가 병마와 싸우다 운명하셨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 중 많은 사진이 그가 찍은 사진이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빈다.


■ 더 볼만한 책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사회사진연구소 | 동광출판사 | 1989년 12월
: 80년대 말, 90년대 초 현대중공업 파업투쟁 등 노동운동을 기록한 사회사진연구소의 사진집.
  한국 사진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작업이었다.
『사진으로 기록한 이 시대 우리 이웃 시리즈』 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단 | 눈빛
: 사진 전문 출판사 눈빛에서 나온 민중들의 삶을 기록한 사진집. 현재 5권이 나왔다.


[양솔규(노동당 기관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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