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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와 반체제 인사 사이에 이루어지는 언쟁인 ‘정치 재판’은 불가피하게 수많은 명언을 낳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카스트로의 “역사가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라는 말이며, 이후 이 말은 다양한 변주 속에서 반복되었다.
이 말은 민중과 역사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상을 아래로부터, 더 낫게 바꾸려는 사람들의 좌우명으로 분명 손색이 없다. 하지만 진보에 대한 회의 혹은 포스트모던적 상황 등을 고려에 넣지 않더라도 이 말이 발화 시점에서의 발화자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마오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권력을 쥔 자는 역사 운운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권력을 휘두를 뿐이다.
힘과 권력에 대한 이런 현실주의적 상황은 체제와 반체제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반체제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뭐라고 하든 ‘야권연대’는 힘이 있는 약한 ‘진보’ 정당과 개인 들의 제도적 생존 방식이다. 문제는 그것이 역사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후를 전망할 수 있는가이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제안했다는 ‘범야권 전략협의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아래 논평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정치 세력인 노동당으로서,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논평에서 밝혔듯이 뜻이 좋아도 현실적인 힘이 없다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큰 변화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세력이 직면한 문제이다.
여기서 심리적 선택지는 두 군데이다. 하나는 말 그대로 하나의 밀알이 되겠다는 소박한 심성이다. 우리가 직접 실행하지는 못해도 우리의 프로젝트가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흔히 말하는 ‘...명예도, 이름도 없이...’라는 마음으로. 다른 하나는 기다림이다. 누구나 시작은 미약하다는 역사적 진실에 기대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체제의 탈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소수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체제에 균열이 일어날 때 그 틈으로 밀고 들어오는 대중의 에너지에 함께 하면 된다.
물론 현실적인 정치 세력으로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심리적 선택지일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돌아가고, 우리도 그 속에서 살아가고 싸우고 있다. 그렇다면 장기적인 심리적 선택지만이 아니라 중단기적인 정치적 선택지도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한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기회를 잡는 노력만큼이나 기회를 잡을 능력도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래 논평은 ‘야권연대’를 추구하는 세력의 밑바닥에 있는 곤혹스러움을 드러내려 했지만, 우리의 곤혹스러움도 의연중에 비친 셈이다.


낡은 야권연대가 아니라 삶을 위한 대안의 정치가 필요하다!


지난 1월 25일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범야권 전략협의체’ 구성을 제안함으로써 이른바 정권 교체를 위한 야권연대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물론 그 직후 문재인 대표가 사퇴하고, 여전히 정치 세력과 개인 들의 이합집산과 정비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당장 진척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름이야 어떻든 심상정 대표의 제안은 진보 정치 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곤혹스러움과 빗나간 결론을 다시금 보여준다.
우선 곤혹스러움은 선거법을 포함한 현행 정치 제도와 정치 지형이 소수 세력의 목소리를 아예 막고 있기 때문에 나온다. 사실 이는 곤혹스러움이라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것이다. 제도의 문턱을 넘지 못할 경우 아무리 좋은 이야기와 비전을 제시해도 나쁜 의미에서의 몽상가 취급을 받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난 8년 간 한나라당/ 새누리당 정권이 보여준 퇴행과 민주주의의 파괴라는 현실이 너무 참혹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정권을 바꾸어야 한다는 무거움이 있다. 이는 다시 현행 정치 제도와 맞물려 자신의 존재가 그러한 정권 교체의 열망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곤혹스러움으로 나타난다.
이런 식의 곤혹스러움이 해소되는 것이 야권연대라는 손쉬운 결론이다. 여기서 현 정권은 절대악이 되기 때문에 정권 교체는 대의로 승화되고, 진보 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원내 진입은 일종의 전리품이 된다.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나은 수를 달리 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속에서 진보라고 부르는 내용은 사라진다. 물론 더 이상 이것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진보라는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겠다.
혹자는 새누리당보다는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정권이 훨씬 나은 것이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권이 들어서야 제도적, 정치심리적 조건의 변화로 진보 세력이 더 큰 목소리를 내면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정치는 정치 계급 사이의 놀이가 아니라 대중의 움직임이다. 대중이 움직일 때 정치가 형성되고 정치가 변화한다. 우리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들이 수립하려 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지반을 스스로 허무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만들어낸 비정규불안정 노동체제가 민주주의의 퇴행을 가져온 것이고, 한나라당/ 새누리당 정권이 한 일은 이를 좀 더 밀고 나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제국주의를 심판할 수 없다’는 말처럼 더불어민주당은 새누리당을 심판할 수 없다. 그러니 정권 교체를 위한 야권연대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자고 말하는 셈이다.
물론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하지는 않겠다. 정치와 역사는 끊임없이 유동하는 것이니 말이다. 심상정 대표의 제안에는 정권 교체 앞에 ‘민생’이라는 말이 붙어 있고, “야권 연대의 중심은 민생 살리기”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가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 정치 행위 자체가 정치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삶을 위한 것이다. 문제는 심상정 대표가 말하는 민생 살리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선 곧바로 더불어민주당의 ‘경제민주화’, 국민의당의 ‘공정경제’ 그리고 많이 이야기되는 ‘소득주도 경제’ 등을 언급하면서 야권이 공통성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 공동 공약을 만들자고 한다. 그런데 말만 난무할 뿐 정작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무엇이 공통점인지도 불분명하다. 유일한 공통점은 정치 계급으로 살아남겠다는 이들의 열망뿐일지도 모른다.
만약 심상정 대표의 소망대로 진짜로 민생을 살릴 수 있는 공동 공약이 나오고, 무엇보다 이 약속이 실천될 수 있다면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권 교체는 역사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로 민생을 살릴 수 있는 공약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아름다운 말의 향연이 아니라 현실을 찌르는 날카로운 무기여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위기가 심각한 만큼 그 대안은 획기적인 것이어야 한다. 최저임금 1만 원이 무리한 요구인가?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서 일자리를 나누자는 게 헛된 바람인가? 모든 국민의 삶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게 근거 없는 주장인가? 이런 제도를 통해 온 국민의 피땀을 쥐어짜는 수출주도 경제가 아니라 모두가 제대로 된 삶을 누리는 새로운 균형적인 경제를 만들자는 게 이룰 수 없는 꿈인가? 그리고 이를 위해 대재벌과 불로소득에 높은 세금을 매겨 최소한 OECD 평균 수준으로 조세부담률을 높여야 한다는 게 막무가내의 요구인가?
진정으로 민생을 살리는 정권 교체를 위한다면 여기에 답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이 대안으로 제출되는 장이라면 노동당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안효상(노동당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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