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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에서 경희궁을 본 다음, 사직단으로 가다.


이별을 불러오던 정동의 찬바람을 맞으며

 

11월 ‘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종로 중구 걷기 모임’은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앞에서 지난 22일(일) 오전 9시 30분에 집결했다. 정동을 거쳐 사직단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덕수궁의 정문 앞에 집결한 것은 최근 광장공포증에 시달리는 MB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의 철학 없는 디자인 중심의 닫힌 행정 때문에, 대한문이 민주화의 성지처럼 된 곳이라 찾기 쉽고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에서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세조 임금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왕족의 사가가 왕궁이 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을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경복궁 등 모든 궁궐이 불타 한성 내에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한 것에서 유리한다.

당시에는 현재의 정동을 정릉동이라고도 부르고 있었다.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가기 전에 있었던 곳이라 정릉동이라 불리다가 정릉이 옮겨간 이후에는 정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을 복원하여 이거하면서 경운궁이라 칭하였다. 나중에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다음 30년 간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과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으로 축소되었다.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을 한 직후, 태후와 태자비 등을 경운궁으로 옮겨와 살게 하였고, 자신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 당한 후 경운궁에 머물렀다. 일제는 경운궁을 퇴위한 고종이 사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덕수궁이라고 부르게 된다.

일행들이 집결한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우진각 지붕 집으로, 궁궐의 정전인 중화전 정면에 있었던 것을 동쪽으로 옮긴 것이다.

언제부터 인가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나 부부가 함께 걸으면 헤어지거나 이혼을 한다고 터부시 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면 이혼심판을 하는 가정법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수궁의 돌담길을 따라 정동으로 들어서면 배재학당과 이화여고, 서울시립미술관, 정동제일교회, 유관순기념관, 정동극장, 경향신문 등이 있고, 구한말 정치인과 구미 외교관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되던 손탁 호텔, 러시아 공사관, 문화체육관, MBC방송국 등의 터가 있다.

정동 길 왼쪽에 서울시청이 임시로 이전해 와서 쓰고 있는 건물과 시의원회관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청사 앞에는 지난 봄 용산참사 이후 아직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는 주민들 몇 명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연좌농성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누군가에게 주려는지 목도리를 뜨고 있는 아주머님의 모습이 오늘 따라 더 처량하게 보이지만, 살아남은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내 가슴을 뜨겁게 했다.

간혹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시청 청사 아래의 석축을 보고 있자면, 옛 서울성곽의 흔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돌의 모양이 그런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어서 좀 더 알아봐야겠다.

우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길가에 작가의 이름이나 제목이 없는 ‘사람의 키를 낮추어 눌러 놓은 모양의 가족상’이 보인다. 어쩌면 저렇게 정확한 비율로 키를 낮추어 조각을 만들어 놓았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간혹 지나다니면 나를 늘 웃게 만드는 재미난 조각이다. 약간 더 가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미국대사관저가 나오는데 나는 별로 관심 없이 지나친다. 정동로타리 가운데 가수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연가’의 작곡가인 고 이영훈씨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작은 노래비는 인물과 마이크를 연상하게 하는 표식과 노랫말이 써져 있다. 워낙 작은 노래비라 주목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다시 정면으로 길을 건너면 60~70년대 발간되던 장기봉이 창간한 독자 중심의 상업신문이었던 신아일보 사옥이다. 신아일보는 1980년 10월 언론기관통폐합 때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되었다.

신아일보 사옥은 앞에서 보면 별로 볼품이 없지만, 옆의 담쟁이는 초겨울에도 정취가 있다. 신문사 우측에는 러시아대사관이 들어와 있다. 원래 90년대 초반 러시아와 수교가 되면서 정동의 러시아공사관 자리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부지 일부가 개인 땅이라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바로 옆에는 1885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 터와 박물관이 보인다. 고종 임금이 이 학교를 ‘배재학당’이라 이름 지어 간판을 써 주었다고 전한다.

학당 터에는 터를 알리는 표식과 배재학당의 교사를 지냈고, 언론인이었던 남궁억 선생의 집터를 알리는 표식이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배재학원의 120년 역사를 담은 다양한 자료가 역사별로 전시되어 있고, 김소월, 주시경, 이승만 등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동문 소개가 되어 있다.

<텬로력뎡>이라고 하는 국내 최초의 영문소설 번역서가 1895년 배재학당에서 운영하던 삼문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배재학당은 당시 미국의 선진교육과 출판을 국내에 적용함과 함께 일제 때는 기독교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인근의 정동제일교회와 이화학당 등과 함께 기독교 선교, 교육, 독립운동의 큰 획을 그은 의미 있는 곳을 둘러보니 기분이 좋다.

배재학당 옆에는 구한말 한성재판소 자리에 일본이 만들었던 대법원 청사를 이용하여 만든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1920년대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옛 대법원 건물을 전면부의 파사드(Facade)만 그대로 보존한 채 좌우측을 신축한 것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일제의 대법원을 해방 이후에도 우리정부가 40년 가까운 시간동안 그대로 쓰다가 새롭게 강남에 신축을 하여 이전을 한 것은 올바른 일이지만, 이곳을 일제의 침략이나 잘못을 알리는 역사박물관으로 만들지 않고 미술관으로 만든 이유는 아직도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찬반의견을 보면서, 올바른 역사인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에 빠져든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정동의 찬바람이 오늘은 더 스산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근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정동

 

정동의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에는 조선 5현 가운데 한사람으로 예(禮)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을 탐구하던 유학의 한 분야인 예학을 태두인 사계 김장생 선생과 그의 아들이며 예학의 대가였던 신독재 김집 선생의 생가 터를 알리는 작은 표지석이 보인다.

길을 앞으로 더 전진하여 정동제일교회로 간다. 1885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감리교회다. 미국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자신의 사택에서 조선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의 시초가 된다.

특히 교회 내부의 벧엘예배당은 1897년에 건축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건물로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도 1918년에 이곳에 봉헌되었으며, 성가대는 한국 개신교 음악 문화를 선도했다.

또한 1887년에 설립된 정동부인병원은 한국 최초의 어린이와 부녀자 전용 병원이다. 정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는 아펜젤러가 맡았고, 1902년에 제4대 담임목사로 최병헌이 부임하면서 한국인이 당회장을 맡게 되었다.

제5대 현순, 제6대 손정도, 제7대 이필주 담임목사는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이다. 1919년에는 담임목사 이필주와 전도사 박동완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면서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3·1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한 이화학당의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도 신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정동교회는 미국식 기독교의 초기 전파지였으며, 교육과 독립운동에도 주도적 역할을 한 성전이기도 했다.

정동교회 앞에는 정동극장이 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를 복원한다는 기치 하에 1995년에 건립되었다.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전개, 청소년 문화의 육성이라는 세 가지 지표 아래 다양한 공연예술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고 있으며, 주변의 다른 문화공간과 함께하는 도심 속 문화관광 명소다.

그 위쪽으로 올라가면 골목 안에 너무 유명해 많이 기다려야하는 추어탕 집이 있고, 그 옆에 2008년 등록문화재 제402호로 지정된 구 신아일보사 별관이 나온다. 1930년대에 지하1층, 지상2층으로 건축된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외벽은 상하이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쌓은 것이다. 신문사 별관으로 사용되면서 1975년에 지상4층으로 증축되었다.

원래 구한말 관세청사로 쓰였고, 조선 최초의 서양인 외교고문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다. 그 뒤 미국기업 싱어미싱사의 한국지부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1963년 신아일보사에 매각되어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구한말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1980년 신군부의 언론기관통폐합 조치로 언론수난현장을 대변하는 등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또한 당시 민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슬라브(Slab) 구조 및 원형철근 사용 등 일제 강점기의 건축수법이 잘 보존되어있어 근대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그 앞에는 이화학당 자리인 이화여고가 보인다. 이화학당은 1886년(고종 23)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된 메리 F. 스크랜튼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이다. 

설립 이듬해인 1887년 2월에는 고종 임금이 ‘이화학당’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다. 이는 사액서원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근대식 여학교임을 의미한다.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은 점차 학제를 정비하여 1904년에는 중등과를, 190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함으로써 일관된 학제를 마련하였다. 이화학당은 1908년 5명의 제1회 중등과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어 우측에 2~3년 전에 새롭게 신축하여 자리를 잡은 주한캐나다대사관이 보이고, 미술 특기생을 위한 중학교인 예원학교와의 사이 길을 올라가면 구 러시아 공사관이 보인다.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지만 1977년 사적 제253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러시아 공사관 건물은 1885년(고종 22)에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설계자는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1896년 2월 1일 세자와 함께 옮겨가 이듬해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피신해 지내던 곳이다.

또한 아관파천 중에 친일파였던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는 등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의미 있는 건물이다. 한국전쟁 이후 거의 소실되었다가 70년대 탑부만 복원되어 남아있고, 그나마 공사 중이라 볼 것이 없다.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는데 덕수궁까지 연결되어있다.

공사관 아래에는 공원이, 옆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옆에는 경향신문사가 2~3년 전에 건축 시행한 노인전문복지시설인 상림원이 있다. 중국 고대의 진, 한나라의 천자가 거닐던 정원이라는 뜻의 아파트로 덕수궁의 후원이었음을 강조한 집이지만, 분양이 순조롭지 않아 신문사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들었다. 
 
현재의 경향신문사 사옥은 원래 러시아 정교회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길을 다시 나와 전진하면 정동아파트가 있다. 정동에 있는 유일한 살림집이라고 보면 된다. 40년도 넘은 오래된 아파트지만 정비와 보수를 잘해서 인지 겉모양은 멀쩡하다.

1층 입구 왼쪽에 ‘구가(guga)도시건물사무소’가 보인다. 경주에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한옥호텔인 ‘라궁’의 설계를 이곳에서 했는지, 조그만 모형이 창문 틀 위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보기 좋다.

길 건너 창덕여중 옆쪽으로는 중화 기독교 한성교회라는 자그마한 교회가 있다. 1912년 화교들을 위해 문을 열었는데 1958년 벽돌로 신축한 건물을 아직까지 쓰고 있다. 2층짜리 교회와 앞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

그 앞에 정동국시와 경향갤러리가 있는 경향신문사 별관과 본관이 보인다. 한국의 1세대 건축가인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작품이다. 1967년에 완공된 건물로 예술품 중에 하나지만, 현재는 낡고 초라한 모습이 신문사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김수근은 지금은 사라진 한국일보 사옥을 설계했고, 세운상가, 불광동성당, 경 복궁역사, 국립진주박물관, 공간사옥 등을 설계한 유명 건축가다.

경향신문사 앞쪽으로 길을 건너면 현재 문화일보 사옥이 나온다. 예전 동양극장이 있던 곳이다. ‘홍도야 울지마라’ 등의 신파극을 공연하던 유명한 공연장이었지만, 연극 공연이 인기를 잃은 이후 건물이 사라지고 문화일보가 들어섰다.

경향신문을 끼고 우측으로 돌면 1912년 설립된 피어선성경학원이 있던 피어선학원재단빌딩이다. 현재는 임대료가 저렴하고 교통이 좋아 가난한 사회단체가 많이 입주하고 있어 유명한 곳이다. 피어선신학대학은 현재 평택으로 이전하여 평택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어 종합대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 씨티은행 서울지사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경희궁 터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보인다.

 


경희궁을 복원할 생각이 있기는 하니?

 

경희궁 터 안에 만들어진 서울역사박물관을 지날 때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또한 경희궁 안쪽에 있던 서울중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한 이후에 세워진 서울시립미술관의 경희궁 분관 역시도 나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전시장이다.

일본의 대법원 터에 세워진 덕수궁 옆의 서울시립미술관 역시도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이곳은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곳이다.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가장 파괴가 심한 곳이 바로 경희궁이기 때문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의 건물이 함께 있었으나 융복전과 집경당은 일본의 권력자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졌고, 나머지 건물들은 1910년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 귀족들의 자제들을 위해 설립된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또 다시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회상전은 남산의 일본 절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 안의 정각원으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인 남산의 박문사 정문으로 갔다가 해방이 된 다음에는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오랫동안 쓰이다가 겨우 경희궁의 정문으로 그 위치를 옮겨왔다.

정부와 서울시가 발굴 조사를 계속하여 복원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자리에 장시간 동안 정부 기관인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원, 서울시교육청 등이 들어서 있어 복원의 의지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서울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이 경희궁의 정중앙에 터를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서울시가 역사를 말할 자격도 철학도 없는 정책을 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3개의 기관 정도만 자리를 비운다고 하면 경희궁은 어느 정도 복원의 틀이 이루어지는데도 말이다. 정부기관이 좋은 자리를 전부 차지하고 있으니 복원을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더 수월한데도 말이다.

아직도 동국대 안의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는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옮겨오지 못하고 원래의 설계대로 복원이 된 건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부가 너무 깨끗하고 용상과 뒷면의 오봉일월도, 천정의 용 문양 또한 너무 또렷하다. 새롭다는 느낌이 좋기는 하지만 왠지 새로움이 주는 감동은 적었다.

경희궁을 둘러 본 다음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서대문이라고도 불리던 돈의문 터 앞에 선다. 누구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문’이다. 서울시가 최근 복원을 한다고 하니 기쁜 일이기는 하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철거된 문으로 대략적인 모습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무지개문을 큼지막하게 내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 지붕집의 초루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한 모양이었다고 전한다.

이제 삼성병원 안에 있는 경교장으로 들어간다. 백범 김구 선생의 개인 사저이다. 최창학 소유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이라 하였으나, 선생이 경교장이라 개칭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주도했다.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건물의 중요성이 재평가되면서 2005년 국가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2층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선생의 집무실이 원형대로 복원되어 기념실로 운영되고 있다.

경교장을 나와 서울성곽의 옛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우측의 서울시교육청과 서울복지재단을 지나 갈림길이 나온다. 바로 전진하면 좌측에 스위스대사관이 있고 윗길로 가면 홍난파 가옥이 나온다. 난파는 일본에서 도쿄음악학교에서 공부한 후 귀국, 1920년 ‘애수’를 작곡하고,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이후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 이화여전 강사, 경성보육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1935년부터 ‘백마강의 추억’ 등 모두 14곡의 대중가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주도로 결성된 친일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했고, 1938년에는 대동민우회, 19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 등에서 친일활동을 했다.

천재 음악가였지만, 친일 역사로 우리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난파의 집은 송월동 독일인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독일인들이 건축한 건물로 난파가 말년에 6~7년 간 살면서 음악 활동을 한 곳이다.

2층짜리의 아담한 난파의 집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기념관으로 평일 낮에는 자유 관람이 가능하다. 1년에 1~2차례 종로구 주관으로 음악제가 열리기도 한다. 정남향이라 햇살이 좋고, 지하층은 현대식 반지하층 개념으로 활용이 좋은 편이다. 서쪽 벽은 담쟁이가 좋다. 

난파 기념관 뒤쪽에는 구세군 영천영문교회가 있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감리교 목사이던 윌리엄 부스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가 창시했다. '그리스도교 전도회'라는 명칭으로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상전도를 한 데서 기원한다.

그리스도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선도와 교육, 가난구제, 자선 및 사회사업을 통해 전인적 구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878년 구세군으로 개칭하였다. 조직은 군대식 제도를 모방하고 교회를 국제적인 단일조직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도 1908년 영국에서 파견된 로버트 호가트 정령이 이끄는 10여 명의 사관이 선교를 시작한 이래, 의료선교, 고아원, 양로원, 육아원, 교육기관을 통해 포교에 힘쓰고 있다.

영천교회를 지나 사직터널 위를 지나면 임진왜란 당시의 3대 명장인 권율 도원수의 생가 터가 나온다. 현재는 집의 흔적도 전혀 없지만, 그 자리에 4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듯하다.

권율 장군을 떠올리면 어린 시절 그의 옆집에 살았던 장군의 사위 백사 이항복 선생이 떠오른다. 백사는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를 오랫동안 전하고 있다.

어린 시절 이항복의 집 감나무가 권율 장군의 집 담장을 넘어 자라고 있어, 그 집의 하인들이 함부로 감을 따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당연히 권 대감 집 하인들이 주인의 힘을 믿고 감을 따고도 돌려주지 않았고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형국이 되었다.

화가 난 어린 이항복이 권 대감 집으로 달려가 문 속으로 손을 잡어 넣고는 “대감님 이 손이 누구의 손입니까?” 라고 물어본다. 갑자기 문종이 사이를 파고든 어린 소년의 손에 장군은 놀랐지만, “당연히 너의 손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어린 항복이 “그런데 왜 저희 집의 감을 대감님 집의 종들이 함부로 따 가냐”고 따진다. 이에 권 장군은 노복들의 잘못된 행동을 알게 되고, 어린 소년의 재주와 기지에 감동 하게 되어 훗날 사위로 삼는다는 이야기다.

은행나무 옆에서 임진왜란으로 전국을 누비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발로 뛰던 권율 장군과 이항복 대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종묘와 사직은 어디로 가고, 공원만 남아

 

종로구 행촌동 서울성곽 바깥쪽인 사직터널 위의 권율 장군 옛 집터에는 딜쿠샤(Dilkusha)라고 불리는 1923년에 지어진 서양식 붉은 벽돌 가옥이 하나 있다.

금광개발업자이자 영국 런던 데일리뉴스 한국 특파원(Free)으로 서울에 머물렀던 미국인 알버트 와일드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가 지어 조선에서 추방되던 해인 1942년까지 거주하던 곳이다.

건물 초석에 'DILKUSHA 1923' 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DILKUSHA'는 그의 인도인 부인을 위해서 작명한 이름으로 힌두어로 '행복한 마음', ‘이상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큰 아치형 창문과 지붕 모양 등이 한눈에 서양식 건물임을 알 수 있는데 지금도 여러 가구가 살고 있다.

딜쿠샤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이유는 테일러가 일제의 눈을 피해 3.1 독립선언문을 입수해 전세계에 알렸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1948년 사망 당시‘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무덤은 마포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딜쿠샤를 본 다음 길을 돌아 지식경제부의 사직사 방향으로 길을 잡아 올라 간다. 길 좌측에 서울성곽이 보인다. 이곳에서 인왕산을 지나 자하문, 다시 북악을 넘어 혜화문을 거쳐 낙산까지는 어느 정도 성곽의 흔적이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남아 있다.

우리는 안쪽으로 길을 잡아 사직단 방향으로 이동한다. 사직단이 보이는 사직공원 귀퉁이에 단군성전이 있다. 성전 안에는 단군영정을 봉안하여 한민족의 상징으로 기리고 있으며, 현정회가 주최가 되어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국조 숭모의 참뜻을 새기기 위해 건립되었다.

단군성전은 백악전이라고도 불린다. 성전 안에는 단군영정과 단군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곳은 지난 1968년 이숙봉의 희사에 힘입어, 단군성전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공공건물로 건립된 후 현정회로 이관되었으며, 1973년 서울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 1990년 쌍용그룹의 도움으로 증축했다. 현액인 단군성전은 김응현, 홍익인간 글씨는 원중식, 이화세계 글씨는 손경식, 내외삼문의 간판은 이현종이 각각 쓴 것이다.

사실 나는 사직단에 왜 단군성전이 자리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국조 단군의 성전이 필요하다는 판단은 들지만, 사직단에 있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아 약간은 의아하다. 이것은 사직공원 안에 있는 사임당과 율곡의 동상이나 종로도서관 역시도 마찬가지다. 꼭 문화재를 파괴하면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얼까?

단군성전을 둘러 본 다음 맨 안쪽 위에 있는 활터인 황학정으로 이동했다. 1974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곳이다. 사직공원 뒷산 인왕산 기슭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건평 59㎡이다.

1898년 고종 임금의 어명으로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이 다섯 군데 있었는데, 필운동의 등과정, 옥동의 등룡정, 삼청동의 운룡정, 사직동의 대송정, 누상동의 풍소정 등으로 이를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이라고 하였다.

오사정은 조선 전기부터 무인의 궁술연습지로 유명했는데, 갑신정변 이후 활쏘기 무예가 쇠퇴하자 많은 활터가 사라졌고 일제강점기에는 활쏘기를 금지했으나 황학정만 그 맥을 이어왔다. 지금 황학정이 세워져 있는 곳은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이다. 대한제국 때까지 남아 있던 유일한 궁술연마장으로 지금도 이곳에서는 궁술행사가 열리고 있다.

당일은 활을 쏘는 사람이 여러 명 나와 시위를 당기고 있어, 나도 눈으로 활쏘기를 즐길 수 있었다. 만일에 있을지도 모르는 안전사고예방을 위해서 인지 활의 촉은 없는 상태에서 무게감을 위해 앞에 쇠로 봉을 만들어 단 것이 특이했다.

촉 없는 활을 과녁을 향해 쏘아 명중이 되면 과녁의 나무와 화살의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려 실력 확인이 가능한 것 같았다.

7~8명의 궁사들이 활을 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보고 있다가, 황학정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정자 뒤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마실 수 있게 되어있었는데 겨울이 다 되어서 그런지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나뭇잎이 너무 많고 지저분하여 직접 마시보지는 않았다.
 
황학정을 둘러 본 다음 아래로 내려와 사직단으로 갔다. 사직단(社稷壇)은 토지를 주관하는 신인 사(社)와 오곡을 주관하는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보통 수도에 궁궐을 건설할 때 궁궐 왼쪽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두었다.

아쉽게도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성역이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공원을 조성한다는 구실 아래 훼손되기 시작했는데 부지를 분할하여 학교를 신설하고 우회도로를 개설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직단의 수난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1897년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태사’ ‘태직’이라고 높여 부르게 했던 사직단의 정문이 1962년의 도로확장공사 때도 본래의 위치에서 14m 가량 뒤쪽으로 밀려났다.

현재 공원 내에는 종로도서관, 시립어린이도서관, 노인정, 체육시설, 운동장 등의 공공시설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단군성전, 이이, 신사임당의 동상 등이 있다. 인왕산 길의 진입로가 가까이 있어 등산객과 산책객이 많이 찾는다.

안타까운 것은 입구의 사직단 정문과 사방이 봉쇄되어 출입이 불가능한 사직단을 제외하고는 이곳에 문화재가 있는 유적지라는 것을 알기 힘들 정도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사직단과 사직단 정문을 본 다음 인근 누하동의 환경운동연합으로 이동했다. 개인적으로 환경운동연합의 회원은 아니지만, 넓은 마당에 큰 나무와 3층 정도 되는 건물의 1층에는 친환경 매장이 있고, 2~3층의 사무실과 지붕의 태양열 집열판이 너무 좋기 때문에 구경을 간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참 터가 좋다는 생각을 자주하는데, 당일은 일요일이라 아무도 없는 건물과 텅 빈 마당을 둘러 본 다음, 큰 나무를 중심으로 사진을 한 장 찍고, 건물의 사진도 한 장 찍어왔다. 참 건물이 마당에서 보니 2층이고 아래와 뒤에서 보니 3층이구나! 특이하다.

오늘은 역사적인 아픔이 많은 정동과 경희궁, 서울성곽, 사직단 등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역사 인식과 옛것에 대한 보존과 유지, 보수의 필요성을 많이 느꼈다. 또한 우리 정부의 무심함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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