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10.08.02 14:23

[이너뷰]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주대환 인터뷰


2010. 08. 03. 화요일

리베르  

 

 

 

 

지방선거가 끝났고, 월드컵도 끝났다. 보궐선거마저 끝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화두 앞에 서야 할 시기다.

 

지금의 민주당은 아니라고 보는 사람, 참여당도, 민노당과 진보신당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 지금의 야당들에 비전을 찾을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은 ‘What is to be done'의 해답을 찾는 여정에 나서야 할 때인 것이다.

 

본지가 그 여정의 첫걸음으로 민노당 전 정책위의장 출신으로 현재 사회민주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주대환씨 인터뷰에 나섰다.

 



그는 50평생을 진보정당 운동에 일로매진했다가 재작년 민노당 분당 사태에 맞이하여 탈당하였으나, 진보신당에는 합류하지 않고 현재까지 무소속으로, 아니 정치 현역에서 아예 몸을 뺐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선수’생활을 접었다. 대신 그는 ‘감독’으로의 전업을 선언했다. 70~80년대 사상 이론가 출신으로 생각해본다면, 적성이 맞는 일을 다시 되찾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감독으로서의 그의 전략과 전술은 사뭇 흥미로웠다.

 

다만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할 것이 있다. 그는 사상 이론가 출신으로서 정확한 개념과 의도 전달에 대단히 신중하다. 때문에 그는 본지에 인터뷰 초고 수정을 간곡히 부탁했다. 이런 이유로 현장 인터뷰 내용에 1획의 가감도 없이 완빵으로 수록하는 딴지 이너뷰의 전통을 깨고, 인터뷰는 많은 수정과 재구성 작업을 거쳤다. 서면 인터뷰같은 문어체로 뒤덮혀져 생생한 대화 분위기가 전혀 감지되지 못하게 된 것은 이런 이유이다.

 

우리는 이번 기획이 자연인 ‘주대환’보다 그의 훈수 내용을 정확히 채록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인터뷰적 문체가 다소 부자연스럽더라도 독자들의 양해를 부탁한다.

 

 


 

 

리 : 2008년 봄이던가요? 민주노동당이 분당되기 직전에 <<딴지일보>>와 인터뷰를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2년 반 만인데요,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주 : 1년 전에 서울로 이사를 와서 인생 3막을 시작하였습니다. 북한산을 걷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남의 자식으로 27~8년, 남의 부모로 27~8년, 잘못과 후회도 많지만, 이제 쿨하게 다 잊고 남은 인생 27~8년, 열심히 재미있게 살아볼랍니다.

 

리 :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지난 2년 동안 무소속으로 계셨죠? 진보신당에도 참여 안하시고, 그럼 이제 정치는 포기하신 건가요?

 

주 : 선수 생활은 포기했습니다. 골도 못 넣는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뭉기적거리고 있으면 다른 선수들에게 걸치덕거리기만 하니까, 이제 감독, 코치 뭐 이런 방향으로 길을 바꾼거지요. 히딩크도 선수 시절에는 골 별로 많이 못 넣었다고 하더라고...허허허. 나도 좌절을 딛고 인생 제 3막에서 선수가 아닌 코치로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 합니다. 10년 후에는 나도 국가대표팀 감독 한 번 하고 싶습니다.

 

 

사회민주주의는 인류의 최대 발명품

 

리 : 명함에 '인류의 최대 발명품을 파는 장사꾼'이라고 써놓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 : 유명한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가 “사회민주주의는 인류의 최대 발명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때의 ‘사회민주주의’는 하나의 사회정치체제로서 북유럽식 복지국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회민주주의연대가 파는 사상 이념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가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많이 실현된 체제이지요. 그래서 제가 누구인지를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해서 한 번 그렇게 써보았습니다.

 


 

리 : 직함이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입니다. 사회민주주의연대는 어떤 단체입니까?

 

주 :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사회민주주의연대는 ‘뉴-레프트' 운동 단체입니다. 지난 번 정권교체 후 보수 쪽을 쳐다보니 ’한반도선진화 재단'이나 ‘시대정신 재단' 같은 ‘뉴-라이트' 운동 단체들의 역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단체들이 이명박 정권의 탄생에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보수를 업그레이드, 업데이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콘텐츠와 수사를. 새로운 국가 비전과 정책 아젠다를 제공하여 보수를 혁신했습니다. 이런 활동은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라운드 바깥에 있는, 그래서 시야가 더 넓은 코치들이 우리 진영과 상대 진영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판 전체를 바라보고, 우리 팀 전체의 살 길을 찾아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진보 쪽에도 그런 역할을 하는 '뉴-레프트' 운동 단체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리 : 그러니까 정치단체라기보다는 사상단체라고 말해야겠군요.

 

주 : 예, 그렇습니다. 축구에 비유를 했으니까 계속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축구팀을 구성하는데 선수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감독과 코칭 스텝도 필요합니다. 사회민주주의연대는 진보진영의 코치, 스텝의 역할을 하려는 단체입니다.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그라운드 밖에서 제공하려고, 특히 담론과 전략을 제공하려고 합니다.

 

리 : '뉴-레프트'라면 '올드-레프트'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주 : 한국의 기존 진보, '올드-레프트'는 7할의 민족주의와 2할의 공산주의와 1할의 무정부주의를 뒤섞어놓은 비빔밥이었습니다. 실천은 '민족민주운동'이었고요. 전형적인 후진국형 진보였지요. '뉴-레프트'는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복지국가운동'하자는 선진국형 진보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민족주의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민족주의 유전자를 뺀 좌파가 곧 '뉴-레프트'입니다.

 

 

'뉴-레프트'는 선진국형 진보

 

리 :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와는 간혹 합동 토론회도 하고, 협력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 :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판 '페이비안 소사이어티'가 되고자 하는, 또 이미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매우 훌륭한 단체입니다. 굳이 역할을 나누자면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는 정책 아젠다 개발에 집중하는 반면 사회민주주의연대는 담론과 이데올로기 투쟁을 전개하려고 하는 단체입니다.

 

리 : 아, 잠깐. 아까 뉴-라이트 얘기가 나왔는데, 뉴-라이트 계간지 <<시대정신>>에 기고도 하고, <<조선일보>>에 인터뷰도 하시면서 비판도 많이 받으셨는데요...

 

주 : 그거는 뭐 전혀 번지수가 틀린 비판이고요, 시간이 흐르면 비판하신 분들도 잊을 겁니다. 보수니 진보니 다 상대적 개념인데 상대와 만나고 싸우고 토론하지도 않고, 보수는 보수끼리만 놀고, 진보는 진보끼리만 놀아서 어떻게 진정한 진보나 보수의 정체성이 형성되겠습니까? 진보끼리만 놀아서는 절대 진정한 진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리 : 그런데 한국에 같이 놀만한 보수가 있습니까? 전부 조갑제 씨 같이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들만 있는 거 아닌가요?

 

주 : 우리가 흔히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는 좀 달리 봅니다. 야당 생활 10년 동안 한국의 보수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화를 했다고 봅니다. 특히 보수 쪽의 지적인 역량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최근 수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습니까? 한국의 대학 교수 사회는 미국 유학파들이 다 장악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각 분야 전문 지식을 미국에서 습득하고 돌아오면서 미국식 사고방식과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돌아왔는데, 대체로 보수적 자유주의 경향입니다. 그들이 보수 진영의 지적인 예비군이 되고 있습니다. 결코 만만한 게 아닙니다. 저는 지난 번 대선이나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압도적으로 이긴 사실을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먼저 지적인 싸움에서 진보가 졌다고 봅니다. 국민들이 보기에 보수가 더 지적인 역량이 많고, 그래서 국가 경영 능력이 있을 거라고 본 겁니다.

 

리 : 진보가 지성의 대결에서 졌다고 말씀하시면 여러 사람들이 반발하실 거 같습니다. 하하. 너무 보수를 찬양하시는 거 아닙니까?

 

주 : 사실 이런 말을 조심하지 않아서 제가 곤란을 자주 당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진보 쪽은 주로 유럽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지적인 역량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그 숫자도 절대 열세하고요, 거기에다가 이 진보 동네 사람들이 제일 곤란한 게 뭐냐 하면, 유럽의 최신 진보를 배워오거든요. 그런데 그게 한국의 사회경제 발전 단계하고는 안 맞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아요. '철지난' 이야기들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유학한 나라에서는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으니까. 진보 지식인들이 “세계적 최신 진보 담론, 일류 진보 이론을 나도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다”는 능력을 과시하기보다는, 우리나라를 잘 설명할 수 있고 우리나라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유학하고 돌아왔으면 이제 한국 현실을 공부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훌륭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생아

 

리 :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는 말로 물의를 빚으시기도 했는데요?(웃음) 너무 보수적인 발언 아닌가요? 아니면 보수 진영 분들이 좋아할 발언이든지?

 

주 : 그건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나름대로 깊은 반성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보니 전혀 달리 보이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부끄러운 나라이거나, 무언가 근본적인 결함이 있어서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없는 나라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탄생 과정이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사생아인지는 모르지만 사생아라고 해서 훌륭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또 사생아라고 훌륭하게 자라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공자도 사생아였습니다.

 

리 : 그러니까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파와 친미파, 변절자들과 배신자들이 만들고,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한, 부끄러운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주 : 사실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당제를 하고 삼권분립을 하고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 그래서 소인배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나라가 군자들이 독재하는 나라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남북한의 역사와 현재 모습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도라는 면에서 보면 대한민국이 길을 제대로 들어선 거지요. 원래 군자는 없습니다. 그건 전근대 지식인들이 욕망의 폭발을 내면에서부터 억제하기 위한 하나의 강박이자 노동하지 않고 밥 먹는 자의 미안함을 숨기기 위한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혁명가'는 '군자'의 다른 버전이지요.

 


 

리 : 대표님은 특히 대한민국에서 ‘평등’이라는 유전자를 발견하고 이를 강조하시는 데요?

 

주 : 건국과 동시에 농지개혁을 해서 당시 국민의 70%에 달하던 농민들이 모두 작은 땅뙈기를 가지게 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남미필리핀은 아직도 토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탄생할 당시의 세계사적인 환경, 진보적 민주주의가 승리한 분위기,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으로 동아시아에서 급팽창하는 공산진영에 대응하는 예방혁명 등으로 인하여 정치, 경제 모두 좋은 길로 들어선 겁니다. 더욱이 한국전쟁으로 전근대의 잔재가 일소되고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역설적으로 한국전쟁은 철저하기 비할 데가 없는 사회혁명이었지요. 그래서 모든 국민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가 된 것입니다. ‘평등’의 위대한 힘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지요. 이승만이나 박정희 같은 정치가의 리더십, 정주영이나 이병철 같은 기업가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보수 진영은 비과학적입니다. 그런 지도자나 기업가가 다른 나라에는 없었습니까?

 

리 : 사회민주주의연대가 조봉암 선생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받드는 이유는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좌파,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들 중의 한 분이기 때문입니까?

 

주 : 예, 우리는 그 분을 너무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백범을 존경한다니까 따라서 존경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남의 할아버지를 모셔놓고 제사 지내온 쌍놈들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조봉암을 복권시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진보의 정당한 자리를 찾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 속에서, 제헌헌법과 농지개혁에서 진보의 뿌리를 찾자는 것입니다.

 

 

조봉암은 반공좌파 아니면 반북좌파

 

리 : 조봉암의 노선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주 : 조봉암의 노선은 '반공좌파'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의 노선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조봉암은 여전히 살아있는 문제이고, 의미가 있는 '문제적 인물'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분이 간 길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진보의 '오래된 미래'라는 말씀입니다.

 

리 : 강남좌파는 들어보았지만 '반공좌파'는 처음 듣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은 다당제와 의회민주주의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활동하였는데요?

 

주 : 역시 말이 길면 이해가 안 되고 말이 짧으면 오해가 생깁니다. 유로코뮤니즘의 존재를 깜박했군요. 반공좌파가 듣기 거북하면 반북좌파라고 할까요? <<동물농장>>이라는 소설을 써서 스탈린체제를 비판했던 조지 오웰의 입장과 같으니 반스탈린주의좌파라고 할까요? 어쨋거나 폭력적인 극우 반공주의야 물론 아니지만,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또 냉전시대에 서방 진영에 속함을 분명하게 하고, 공산당 일당독재가 아닌 다당제 민주주의의 길을 간, 바로 그것이 사회민주주의 노선입니다. 조봉암 선생이 걸으신 길이지요.

 


 

리 : 야당 정치인들은 대부분 백범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고 대답하는데 대표님은 예외라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주 : 물론 저도 백범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존경합니다. 그러나 정치가로서는 아닙니다. 그 분은 우남과 구별되는 비전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뉴-라이트 쪽이 제기한 역사 논쟁에 대하여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주로 백범(김구)에 의지하여 우남(이승만)에 반대한 겁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전쟁이지요.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현실에서는 우남을 따르고 그 우남이 장기집권하다가 쫓겨나 그를 존경할 수 없으니 대신에 백범의 사진을 걸어놓고 사는 한국 사람들의 이중생활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리 : 그러고 보면 민주당 계열 분들이 백범을 존경한다는 건 조금 이상합니다.

 

주 : 그렇습니다. 민주당의 뿌리는 원조 보수 한민당입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인촌 김성수 선생입니다. 그런데 인촌도 그렇지만 지주, 자본가 출신이 많다보니 대부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친일을 했거든요, 그래서 부끄럽다고 자기 할아버지들 사진은 숨겨두고 남의 조상 사진을 걸어놓고 있는 셈입니다. 참 민망한 일입니다. 더 민망한 것은 스스로를 근본주의 좌파인줄로 아는 사람들이 한민당을 뿌리로 하는 민주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거나 시나브로 들어가서 당원 노릇을 하면서 부끄러운 줄 몰랐다는 겁니다.

 

리 : 백범 선생은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판단은 옳았습니까?

 

주 : 백범의 판단은 옳지 않았습니다. 죽산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대한민국을 만든 세 주역은 우남, 인촌, 죽산이었습니다. 뉴-라이트에서는 우남이 기획하고 우남이 세운 나라, 대한민국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각관계 속에서 서로 견제하고 타협하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실은 인촌은 특별히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보수 세력의 지도자였으니까요. 그래서 미래 지향적인 비전은 우남과 죽산이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남과 죽산이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그리고 두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1, 2등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리 : 역사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현재의 문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지난 번 인터뷰에서 '노동당 노선'의 실패를 선언하셨는데요, 여전한 생각이십니까?

 

주 : '노동당 노선'은 양당 체제를 그대로 두고 그 틈새에서 불안정하게 겨우 존재하는 작은 정당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제3당 노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노동당'을 만들어서 한국 보수 양당 체제를 깨트리고 한국 정치판을 뒤집어엎으려는 프로젝트였는데, 그걸 포기한 것입니다. 저로서는 20년 세월을 바친 '노동당 노선'의 실패를 쿨하게 인정하였습니다.

 

 

'노동당 노선'의 실패를 쿨하게 인정하다

 

리 : 젊은 논객으로 유명한 한윤형 씨가 대표님의 '노동당 노선' 실패 선언에 대하여, 너무 교조적인 사고, "어떤 길을 정해놓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아니냐"고 논평해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영국과 한국의 토양의 차이라든지, 백년의 시차라든지, 여러 가지 이유로 영국 노동당의 전략을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지요.

 

주 : 제 얘기가 맞는지 안 맞는지는 시간이 지나보면 알지요. 지금쯤은 진보신당 사람들도 대충 알아차리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현미경으로 별을 관측할 수는 없거든. 나는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하여 장기적인 전략을 말하는 겁니다.

 

리 : 여전히 '노동당 노선'을 견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대표님이 너무 빨리 포기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좀 더 참을성을 가지고 인내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주 : 글쎄, 제가 보기에는 모두들 나보다 먼저 '노동당 노선'을 포기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가장 늦게 포기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만든 사람들은 저보다 먼저 노동당 노선을, 행동으로 포기한 셈입니다. 그러면서 생각으로는 여전히 포기 안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 불행의 씨앗이고요. 저는 총선을 이틀 앞두고 가장 늦게 탈당하면서 '노동당 노선'의 포기를 선언하였습니다. 민주노동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노동당 노선'을 반대하던 사람들이니 말할 필요도 없고요, 지방 선거에서 민주당의 하위 파트너로서 공직이나 챙기는 모습을 보세요. 그들은 원래 '노동당 노선'을 걷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리 : '노동당 노선'을 포기하고 대안으로 '민주당 노선'을 내세웠습니다. 파격적인 주장이라 "저 양반 이제 지쳐서 민주당이나 들어가서 한자리 하려고 하는구나!"라는 오해만 부르고 끝난 듯했습니다. 그런데 2년 만에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의 호응(?)이 있군요.

 


주 : 제가 관심을 가진 문제는 오직 복지국가를 실현할 정치적 세력으로서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노동당'이 기성 정당들을 훌쩍 넘어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안 되니까, 역사적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실패하고 깨어졌으니까, 쿨하게 인정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자는 것입니다. 진보정당에 대한 저의 꿈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독일에 도착한 것은 25년 전입니다. 독일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도버해협을 건너서 16~7년쯤 머물다가, 이제 대서양을 건넌 셈입니다. 이제 태평양만 건너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리 :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민주당 노선'은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위원장의 이른바 '빅텐트론'과 같은 것입니까? 차이가 있다면 어떻게 다릅니까?

주 : 제가 말하는 '민주당'은 '미국 민주당'입니다. 미국 민주당은 한국 민주당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닙니다. 실제 내용입니다. 김기식 정책위원장이 그렇게 하자는 건지는 모르지만, 모든 진보세력들이 한국 민주당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결코 미국 민주당 같은 정당을 만들 수 없다고 봅니다. 미국 민주당은 영국 정치구도에서 보자면 '노동당+자유당'입니다. 노동당의 역할과 자유당의 역할을 함께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국 민주당은 '보수당+자유당'입니다. 7할은 보수당, 3할은 자유당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므로 저는 작년 말부터 민주당 이외 군소 4야당이 통합하여 규모는 작더라도 질적으로 순수한 '노동당+자유당'을 먼저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민주당의 '자유+보수'연합은 그 압력을 받아 빠른 속도로 해체될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 정치가 '노동+자유' 연합 정당과 '보수' 정당으로 재편되겠지요. 그런 와중에 ‘역동적 복지국가’라는 국가 비전을 중심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손을 잡으면 야권의 재편을 주도하리라 낙관합니다. 앞으로 10년 안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다

 

리 : 본질적으로 보면 미국 민주당도 한국 민주당과 똑같은 보수정당이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오바마 당선의 충격으로 미국 민주당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지긴 했습니다만.

 

주 : 이거 참, 제가 좀 거칠게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미국 민주당을 보수 정당이라고 하는 얘기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무식한 소리예요. 뉴딜 이전의 미국의 정당체제란 건 지금 한국의 정당체제 비슷했습니다. 공화당, 민주당이 지역적 뿌리가 좀 다른 보수정당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뉴딜 이후의 미국 민주당은 그 이전의 민주당과는 완전히 다른 물건입니다. 대공황이 왔고, 플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나왔습니다. 이때 노동조합과 농민, 흑인과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들이 플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며 뭉쳤던 '뉴딜 연합' 이후 미국 민주당은 미국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뉴딜 정책을 '비미국적인' 사회주의 정책으로 받아들여 격렬히 반대한 계층은 공화당 지지자가 되었으니, 미국 정당 체제는 유럽 정당 체제와 큰 차이가 없는 진보와 보수, 양당 체제로 재편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리 : 미국 민주당은 흔히 당원이 없는 정당, 대중정당이 아닌 엘리트 정당이라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정당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는데요?

 

주 : 그렇습니다. 주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미국의 정당들은 이른바 원내정당이고, 우리나라 정당 비슷하게 직업 정치인 중심의 정당입니다. 그런 정당 문화까지 따라 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리 : 대표님 말씀처럼 미국 민주당을 진보정당이라고 하더라도, 북유럽식 복지국가 실현을 꿈꾸면서 미국 민주당같은 정당을 만들자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 :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아니면 회색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됩니다. 복지국가만 만들 수 있다면 민주당이든 노동당이든 사민당이든 상관이 없지요. 미국 민주당은 회색 고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니 영국 노동당 역시 색이 짙은, 완전한 검은 고양이는 아니죠. 문제는 미국의 독특한 토양입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그 밑바닥에 개인주의가 매우 강한 나라입니다. 개인주의라면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나쁜 뜻으로 쓰이지만, 개인주의란 게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개인의 독립성, 국가권력도 침해할 수 없는 인권과 자유를 강조하고, 모든 문제를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는 자립과 자조의 정신이 강한 나라입니다. 그러니 국가 개입을 극히 싫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지 제도에 대해서도 최소한으로 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중산층을 배제한 복지, 잔여적 복지로 나타난 셈인데, 이런 미국 풍토가 미국 민주당의 정책 노선을 유럽의 사민당과 다르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도 ‘미국식’에 대한 고집을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끝났다고 제러미 리프킨이 <<유러피언 드림>>에서 쓰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사회적 조건과 환경이 바뀌면 미국 민주당의 정책 노선도 바뀔 것입니다. 하여튼 제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든 진보정당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이고, 국가 비전을 미국도 벗어나려고 애쓰는 잔여주의 복지국가로 가자는 말은 아닙니다. 당연히 후발자의 이익을 최대한 누려야지요. 둘러갈 필요는 없습니다.

 

리 : 사회민주주의연대를 흔히 사회민주당을 만들고자 하는 정치단체, ‘사회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 정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은 사회민주주의자라면 사회민주당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민주당'을 만들자고 하시니 사람들이 의아해하지는 않습니까?

 

주 :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언제 어디서나 막무가내로 '사회민주당'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민주당이 아닌 노동당을 만들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영국에서 사회주의가 독일만큼 인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의 힘을 빌려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전략으로 나갔습니다. 뉴딜 시대의 미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또 다른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 나라 풍토에 맞는 전략으로 인민 대중의 바램과 희망을 대변하고, 아담 쉐보르스키가 말한 인류의 최대 발명품인 사회민주주의 정치체제,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름보다는 내용을 중시하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중시하고, 다양한 전략과 경로를 인정하는, 그것이 사회민주주의자의 정신입니다. 개인주의, 평등주의, 물질주의라는 미국의 풍토와 소선거구제라는 제도가 미국 민주당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풍토와 선거제도가 미국과 비슷하지요.

 

 

사회민주주의자는 공상을 하지 않는다

 

리 : 평등주의가 강하고, 개인이 스스로를 책임지는 자립 자조의 정신과 물질주의가 팽배하여 모두가 혈안이 되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사회라는 점은 미국과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소선거구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선거제도가 아닌가요? 대표님의 전략은 선거제도를 불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주 : 선거제도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잘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학자들이 주장한다고 금방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아직도 소선거구제가 유지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전통의 힘은 그만큼 강한 것입니다. 우리는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적 전략으로 우리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삼십 년 후에 선거제도가 바뀐다면 그 때 가서는 새로운 선거제도에 맞추어 전략을 수정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 고맙기는 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서 선거제도를 바꾸자는 시민운동을 그 분들이 직접 전개해주셨으면 합니다. 진보정당이나 진보 정치가들에게 선거제도를 바꾸는 운동을 하라고 주문하는 건 축구 선수에게 게임의 룰을 바꾸는 운동을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선수는 룰이 불리해도 골을 넣어야 합니다.

 

리 : 말씀을 듣다보니 복지국가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지극히 현실주의적 태도와 전략을 강조한 <<복지국가 전략>>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일본학자가 썼던데요. 우리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주 : 스웨덴에서는 벌써 1930년대에 가족 해체, 출산율 저하 등 사회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를 잘 활용하여 보수파들을 설득하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바로 이런 전략적 사고를 배워야 합니다. 그 당시 내세웠던 '인민의 집'이라는 슬로건도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농민들이나 보수파가 좋아하는 말이었습니다. 복지국가를 만들겠다는 목표 의식이 분명하니 필요하면 타협도 하고 설득도 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던 겁니다. 철저히 현실적이었지요.

 


리 : 대표님은 15~6년 전에 당시 민중정치연합이라는 단체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와 인터뷰하면서 “제대로 된 진보정당 하나 만들어서 후손에게 물러주고 싶다”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하는데요, 정당에 너무 집착하는 건 아닌가요?

 

주 : 그건 정당이 현대의 군주, 왕이기 때문입니다.

 

리 : 아니, 민주주의 나라에서 국민이 왕 아닌가요?

 

주 : 한편으로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정당이 사실상 통치합니다. 원리상으로는 국민이 왕이지만 실제로는 정당이 왕입니다. 다만 왕이 여럿이고, 정기적으로 심판을 받도록 제도화해놓았지요. 그것이 현대 대의 민주주의 나라들의 현실입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 체제는 사실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적 요소가 가미된 것입니다. 순수한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유럽 선진국 정당들은 철학자(지식인)들의 집단이거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조직이니, 플라톤의 꿈도 어느 정도는 실현된 셈입니다.

 

리 : 한국의 정당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요?

 

주 : 한국에서 정당은 지식인들이 아니라 명예욕과 돈이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당을 통해 그들이 얻는 공직은 개인적 욕망의 대상입니다. 변호사, 교수 출신들도 많고, 학벌들이야 좋은 편이지만 오로지 개인 출세욕으로 남들보다 더 노력해서 그 자리까지 온 사람들이니 나라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의미에서 '지식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 근본 동기에서부터 '지식인의 의무감'으로 정치를 시작한 사람은 드물다고 봅니다. 그나마 건달들이 주를 이루던 시절에 비하면 나아졌는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한국의 정당은 모조품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후면 한국에서도 ‘지식인 정치’가 시작될 것입니다. 조선이 원래 선비 정치의 나라였으니 우리나라에는 지식인 정치의 전통도 있습니다.

 

 

개념은 중요하다

 

리 : 심상정 진보신당 경기도 지사 후보가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면서 돌연 사퇴하여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주 : 심상정 씨는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몸을 던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훨씬 더 힘든 조건에서 선거를 치르고 있는 진보신당의 다른 후보들 입장에서 보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것입니다. 같이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고 있는 중에 전선에서 이탈한 거니까요. 몇 달 전에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고, 당론을 바꾸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 거지요. 그게 안 되는 진보신당의 문화가 화근입니다. 늦었지만 기왕 몸을 던졌으니, 좀 더 용기를 내서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좀 더 명료하게. 개념을 분명하게 하여, 2000년에 민주노동당 만들 때와는 다른 신개념의 정당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고 깃발을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죽자고 하면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리 : 심상정 씨가 진보신당 내부 논리로 보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지만, 그 전에 진보신당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주 : 제가 보기에 진보신당은 먼저 자기들이 어떤 정당을 만들려고 하는지를 분명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먼저 단일하고 순수한 이념의 힘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정당의 길입니다. 그 길로 들어서면 곧 갈림길이 나오는데 아마 사회당의 길과 녹색당의 길로 나뉘어질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백화점을 차려서 온갖 이슈를 다루고 패권 장악에 나서는 ‘보통 정당’의 길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길에는 선거라는 정기적인 권력 나누기 게임이 있고, 그 게임에는 소선거구제라는 룰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선거구제 하에서는 ‘뒤베르제의 법칙’이라는 흡사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강력한 힘이 작용합니다. 이를 무시하고 가다가 현실의 벽에 부닥치는 것입니다.

 

리 : 그러니까 문제의 뿌리가 깊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어떤 정당을 만들 것인지, 개념을 먼저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주 : 일본의 공산당이나 독일의 녹색당처럼 순수한 이념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당, 초록당을 추진하던 주요섭 씨의 표현으로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정당'이라면, 소선구제 하에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기존의 양당 체제를 넘어서는 것은 그 정당들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런 점을 미리 알고서 가야지요. 자기들이 어떤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진보신당을 하는 사람들이 ‘이념 정당’, ‘등대 정당’을 하려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방선거에 임해서는 ‘16개 광역시도 단체장 후보를 다 내겠다’고 하더란 말입니다. 이상하다고 느꼈지요. “이건 또 뭐야?”라고. 16개 광역시도 단체장 후보는 민주당도 다 못 냈습니다. 개념은 중요합니다. 개념이 명료하지 않으면, 스스로도 헷갈리고, 에너지는 분산되고, 국민들의 눈에는 무엇을 하려는 사람들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리 : '등대 정당'이 아닌 ‘보통 정당’을 만들고자 한다면 어떤 길이 있을까요?

 

주 : 바로 '노동당'의 길과 '민주당'의 길,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이미 '노동당'의 길은 실패하기도 했고, 스스로 포기하기도 하였으니, 남은 것은 '민주당'의 길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민주당'을 영국식으로 표현하면 '노동+자유'당이 되겠습니다.

 

 

사람에 연연하지 않는다

 

리 : 감독으로서 선수들을 평가해주시죠. 정치인들 가운데 누구에게 기대를 걸고 있나요?

 

주 : 나야 아직 선수들이 인정하지 않는 삼류 코치이지만,(웃음) 모든 훌륭한 축구 감독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감독은 선수를 편애하면 안 된다. 훌륭한 선수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된다." 우리는 이념과 대의, 대중과 역사를 믿고,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개인은 누구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역사가 갖고 놀다가 버리는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대의가 이루어지는데 남다른 선의나 순정을 가진 사람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사회민주주의'와 '역동적 복지국가'를 부르짖으면 손을 잡을 것입니다.

 

리 : 최근에 민주당의 정동영 의원이 '역동적 복지국가'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뜻밖인데요, 사실 저는 좀 놀랬습니다. 그 분의 진정성을 믿을만하다고 보시는지요?

 

주 :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인물을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개인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시대이고, 객관적 조건입니다. 개인의 선택의 폭은 매우 좁습니다. 누구든 우리의 대의에 동의하고 우리와 국가비전을 같이 한다면 함께 할 것입니다. 정동영 의원은 대통령 후보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역동적 복지국가'라는 비전에 동의함으로써 우리의 담론이 더 널리 알려진다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거꾸로 생각하면 정치인이란 대중을 만나면서 국민의 바램이 뭔지를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 아닙니까? 지식인들보다 정치인들이 대중의 요구, 시대 변화에 훨씬 민감합니다. 그렇다면 정동영의 변신은 시대 변화를 나타내는 징표의 하나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내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였다"라는 박근혜의 말도 다가오고 있는 시대의 징후이지요.

 

리 : 그러면 박근혜 씨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주 : 아닙니다. 박근혜가 말하는 복지는 잔여적, 시혜적 복지이고, 온정적 보수, 따뜻한 보수가 흔히 내거는 복지이지요. 구체적으로 정책으로 들어가면 그 차이는 확연해집니다. 다만 박근혜가 나름대로 시대의 과제를 감지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아마 국회 상임위 활동도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하면서 복지 공부를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리 : 한국 정치 한쪽 편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있다면 또 한쪽 편에는 노무현의 정치적 아들, 유시민이 있습니다. 유시민의 정치인으로서 가능성을 어떻게 보시는가요?

 

주 : 유시민은 더 효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일의 효도는 아버지 산소를 자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이고, 유언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노무현의 말년의 후회와 반성을 이어받아야 하고 유언을 실천해야 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유시민은 아직 머뭇거리고 있는 듯 보이고, 효도를 다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참여정부의 실패를 반성한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를 불효자로 볼 겁니다. 평소 아버지 말이야 좀 안들 수도 있지만, 유언을 안 들으면 그건 불효자식이지요. 그리고 이른바 ‘노빠’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가 죽은 후에 예수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예수 사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한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하고는 만난 적도 없고, 오히려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박해하던 바울이었습니다.

 

 

‘새로운 한국’ 탄생의 산고가 시작되었다

 

리 :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요?

 

주 :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청년 실업과 자살률, 세계 최저의 출산율 등은 모두 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지난 60년 동안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앞으로 20년 동안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될 것입니다. 물론 정치도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뉴딜 시대를 거쳐 현대 미국이 탄생한 것처럼 말입니다. 대공황과 뉴딜 이전에 미국은 위기다운 위기를 겪지 않았습니다. 그런 혹독한 자본주의 모순의 폭발을 처음 경험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은 대공황 같이 폭발적이지 않은지는 모르지만 국민의 생활에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은 결코 덜하지 않는 위기를 처음 겪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한국이 탄생할 것입니다.

 

리 : 그런 사회경제적 문제는 정치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다고 보십니까?

 

주 : 한국의 중산층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중산층이 불안에 떨고 있으니, 지난 몇 년 동안 정치적 스윙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가,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가, 다시 지난 지방선거에서 거의 묻지마 반MB 투표를 하였습니다. 이런 정치 불안은 결국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정당과 반대하는 정당으로 정치구도가 재정립되어야 해소되리라 봅니다.

 

리 : 그래서 진보정당은 보편주의 복지국가 건설에 나서야 한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문제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세금을 더 내려 하지 않으니 참 난감합니다. 언제나 ‘증세’는 가장 인기 없는 정치적 주장입니다. 어느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습니까?,

 

주 : 아니, 지난 5월 14일자 <<한겨레신문>>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창간 기념 여론조사를 해보니 국민의 72.1%가 “세금을 많이 내더라도 모든 국민에게 복지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응답했습니다. “세금을 낮추고 가난한 사람들만 돕는 것이 좋다”는 사람은 22.7%에 그쳤습니다. 한국 국민은 지금 보편적 복지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편적 복지를 한다면 세금을 더 낼 용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사회상을 물으니 ‘북유럽식 복지국가 사회’라고 응답한 사람이 67%에 이르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사회’라고 응답한 사람은 24.2%에 불과했습니다. 문제를 잘 이해하고서 일관성 있는 답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지식인들이나 정치인들이 국민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스웨덴보다 더 좋은 나라에서 죽을 것이다

 

리 : 2012년에는 정권이 교체될 수 있을까요? 한나라당 정권은 언제까지 간다고 봅니까?

 

주 :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끝나고, 미국이 신뉴딜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우리나라의 보수 정권이 과연 오래 갈까요? 그러나 그에 대항하는 야권의 환골탈태, 진보진영의 준비가 부족하여 2012년에는 한나라당이 다시 집권할 것 같기도 합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니 정권 교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10년 이상은 결코 가지 못할 것입니다. 10년이면 '진보의 재구성'도, 진보진영 내의 이데올로기 교체, 세대교체, 담론과 정책, 국가 비전의 준비 등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리 : 오히려 진보진영의 준비가 문제라는 말씀인데요,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씀은 속단이 아닐까요?

 

주 : 그렇지 않습니다. 뉴딜 이전의 자유방임주의 자본주의, 1930년대 뉴딜 이후 국가가 개입하는 케인스주의적 자본주의, 1970년 이후 대처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거쳐 이제 자본주의는 다시 금융자본을 국가가 규제하고 복지국가를 강화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사적으로 이런 시대일 뿐만 아니라, 한국 내부 사정을 보면 그동안 농지개혁 등의 심대한 효과로 평등 지수가 유달리 높던 한국 사회가 이제 거의 보통 자본주의 나라로 되어버렸습니다. 양극화와 빈부격차, 청년 실업과 출산율 저하, 가족 위기, 노인 빈곤 등이 이제 더 이상 국민 각자가, 혹은 가족끼리 알아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왔습니다. 복지국가 건설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리 : 아무리 문제가 심각하더라도 문제 해결의 주체가 형성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는 노동조합의 조직율도 낮고 진보정당도 미약하고, 언론과 지식인들의 반 복지 이데올로기와 보수 성향은 완강합니다.

 

주 :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정치세력이 복지국가를 선도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격차가 벌어지고 양극화가 진행되지만, 다 형제와 가까운 친구들, 멀어도 고향 친구나 초등학교 동창, 사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요행히 내가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계층으로 태어나서 잘 모르는 남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지지가 매우 높은 겁니다. 세대가 바뀌어서 계급이 형성되기 전에 복지국가를 만들면 우리나라는 평등주의 문화도 보존하고, 국민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데서 나오는 에너지, 특유의 역동성도 되살릴 수 있습니다. ‘다이내믹 코리아’는 진보의 구호가 되어야 합니다. 지식인들의 헌신, 뚜렷한 목표의식, 철저한 조사 연구, 현실적 전략이 필요합니다.

 

리 : 한국은 통일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막대한 통일 비용이 필요할 텐데요, 과연 우리나라에서 북유럽식의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요?

 

주 : 저는 30년 전에 지금의 내가 이렇게 풍요롭고 자유로운 나라에 살게 될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30년 후에 우리가 어떤 나라에 살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세대는 전쟁이 막 끝난 가난한 나라에 태어났지만 어쩌면 스웨덴 보다 더 좋은 복지국가에서 죽을 지도 모릅니다. 통일은 해결하기 힘든 과제이지만 바로 그런 국가적 위기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2차대전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없었다면 영국은 복지국가를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웨덴도 1차 대전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위기의 시대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통합의 요구가 오히려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익 집단과 계급의 충돌이 만성화되어 있는 민주주의는 그 본질이 원래 총체적 난국인지 모른다. 난국에는 제자백가의 출현이 예고되어 있다.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 걸출한 백가들이 일합을 겨루던 춘추전국시대와 다른 점은 백가들이 설득하는 존재가 왕에서 국민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여기 우리시대의 제자백가 중 한 사람인 사민가(社民家)의 주대환이 정열적으로 당신을 설득하고 있다.

 

그는  보수주의의 주류적 담론 바깥에 있는 인물은 분명하지만, 이른바 ‘개혁진보진영’의 주류적 또는 통념적 인식에서도 많이 벗어나 있어 어떤 이들에게는 당혹감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새로운 비전으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의 군주로서, 아니 민주주의 시대의 군주로서 당신의 동의여부가 궁금하다.

 

딴지리베로 리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