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 시간보다 늦은 밤10시 마석모란공원에 다섯분의 열사님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열사님들을 땅에 묻고 돌아오는 길의 마음은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착찹할 따름 이었습니다.
다시 용산으로 버스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유족분들에게 "미안합니다. 힘내세요"라는 말 이외에는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작년 1월 20일 새벽 너무나도 악몽같은 날이었습니다.
1월 19일 연락을 받고 밤10시 용산에 도착하여 20일 아침까지는 제 평생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될 것입니다.
20일 새벽 망루에서 불길이 솟을때는 온 몸에 힘이 빠졌습니다.
남일당건너편에 있던 철거민동지들은 울부짖었습니다.
모든 시민들이 울부짖었습니다.
"저위에 사람이 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그냥 울부짖고 발을 동동 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말들이 떠돌았습니다.
우선 망루에 올라갔던 철거민분들의 신원을 파악하였습니다.
경찰측에 신원 확인 요청을 하였으나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자체 확인 결과 다섯분이 확인되었습니다.
시신은 분명히 남일당 건물에서 나갔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중앙대병원이다, 한강성심병원이다 등 떠도는 말을 쫒아 병원마다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확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다되어서 한남동 순천향병원 영안실이라는 연락을 받고 갔으나 경찰에 의해 막혀있었습니다.
경찰을 뚫고 영안실에 들어가니 당에 오기전 활동하였던 노점상조직인 전노련의 수지지역 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저를 붙잡고 수지지역 회원이던 "이성수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다"라며 행방을 찾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 부인인 권명숙형수가 울부짖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2008년 12월 30일 전철연 송년회에서 성수형과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떠오르면서 또다시 힘이 빠졌습니다.
전노련을 그만두고 무엇을 할까 고민 하던 나날을 보낼 때였습니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성수형이 전철연 송년회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하였습니다.
성수형이 1월에 술한잔 살테니 수지로 놀러오라고 하였는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지난 1년간 용산투쟁을 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12월 30일 협상을 마무리되고 장례를 준비하면서 용산투쟁과 협상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언론에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타결'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용산은 타결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난 1년간 치루지 못한 장례를 치룬것 일 뿐입니다.
9일의 장례식은 용산투쟁이 끝난 것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용산투쟁에 함께 해주신 당원동지들, 장례위원으로 참여 해주신 많은 당원동지들, 추운 날씨에도 장례식에 참여 해주신 많은 당원동지들, 그리고 마음으로 함께 해주신 수많은 당원동지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