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서울시민이 바라는 것은?[시사인]

by 서울시당 posted Jan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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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서울시민이 바라는 것은?

"우리 스스로는 88만원 세대를 '비상구 세대'라고 불러요. 비정규직·상아탑·구직난이 우리 세대를 특징짓는 키워드니까요."

"중소기업의 경우 원해서 들어갔다는 친구가 거의 없어요. 대기업이 경력 위주로 사람을 뽑으니까 중간에 거쳐가는 코스로 중소기업을 택하는 거죠. 경력이 아닌 능력 위주의 채용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얼핏 보면 청년실업 문제를 토론하는 자리 같다. 그런데 아니다. 12월22일 '2010 시민매니페스토 만들기 서울본부'가 주최하는 시민토론회에 청년들이 모였다. 시민의 눈높이로 직접 매니페스토(이행 및 검증 가능한 공약)를 만들어보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시민 공약'을 만들어보자고 당사자들이 머리를 맞댄 셈이다.





정책 선거에 대한 요구는 매번 있어 왔다. '인물' 아닌 '정책' 중심으로 표를 행사해야 한다는 지당하신 말씀이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어왔다. 현실도 조금은 개선되어가는 듯했다. 지난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 일류국가 희망공동체 대한민국 > 이라는 이름의 선거 공약집을 책으로 만들어 배포했다. 서점에서 정가 5000원에 이 공약집을 판매하기도 했다. 정책 공약집을 판매하도록 규정한 공직선거법 새 조항(제138조의 2)에 따른 것이었다.

서울시민 선호도, 일자리 > 복지 > 교육 순

그러나 그것만으로 정책 선거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11월27일 이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에서 대선 때 세종시 원안 추진을 약속한 것은 표를 얻기 위한 부끄러운 공약(空約)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사회 갈등이 생긴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자신의 선거 공약이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거짓 공약이었음을 자인한 셈이었다.

시민들이 다시 나선 것은 이 때문이다. 일단은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 보다 철저한 공약 검증이 필요하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 대해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처장은 "대운하처럼 주변 환경이나 상황 변화에 따라 대통령이 애초 내걸었던 공약을 포기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표를 얻기 위해 거짓말 공약을 내세웠다면 그것은 선거 문화를 한순간에 퇴행시키는 행위이다"라고 말했다.

행동하는 방식도 과거보다 훨씬 능동적이다. 후보자가 내놓은 공약을 사후에 검증하고 감시하기만 할 게 아니라 아예 후보자들이 공약을 내놓기 전 시민들이 원하는 바를 취합해 공약으로 만들자는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지난해 10월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전국 16개 시·도 시민·사회단체와 결합해 '2010 시민매니페스토만들기 추진본부'(2010 시민본부)를 탄생시켰다. 시·도지사 및 교육감 선거 예비 후보자 등록 개시일(2010년 2월2일)을 6개월여 앞둔 시점이었다.





예비 후보 등록이 시작되기 전 시민 공약을 만들어 제시하기 위해 2010시민본부는 3단계로 움직였다. 먼저 전국의 전문가 1000여 명을 상대로 세 차례에 걸쳐 델파이 조사를 벌인 결과,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어젠다를 도출했다. 서울의 경우 이 과정에서 어젠다 약 330개가 제기됐다. 이 중 10개의 핵심 어젠다를추려 시민 토론회를 벌이는 것이 그 다음 단계였다. 전문가와 일반 시민 패널이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인 정책 추진 방향과 아이디어를 짜냈다. 동시에 시민 1000여 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10개 어젠다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작업도 병행됐다. 구체적인 어젠다는 전문가들이 중심이 돼 제시하되, 어떤 정책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 여부는 시민들이 직접 결정하게끔 한 것이다.

그 결과 서울시민이 가장 중요하다고 꼽은 어젠다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통한 경제 활성화'(25.%)인 것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는 '청년 실업자·장년 실직자·신용불량자에게 재기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한다'(16.5%)였다. 시민들이 중시한 또 다른 어젠다는 '복지'와 '교육'이었다. 특히 '공공임대주택 확대를 통한 서민주거 안정'(14.7%)과 '주민참여형 재건축 사업'(8.2%) 등 주거 복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지역 내 교육균형 발전'(7.0%)과 '공동육아 보육시설 확충'(6.8%) 등 교육 부문 요구가 그 뒤를 이었다.

이는 예비조사 결과와도 맥이 통한다. 지난해 10월16일 2010시민본부가 여론조사기관인 세이폴에 의뢰해 벌인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응답자는 '지금 사는 지역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정책 항목'으로 지역경제(35.6%) > 도시계획 및 개발(14.6%) > 복지(12.1%) > 교육(11.5%) > 환경(11.2%) 등을 꼽았다. 이에 반해 서울시민은 도시 개발(14.0%)이나 환경(8.1%)보다는 복지(16.5%)와 교육(15.6%) 쪽 정책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지역경제는 서울(29.4%)에서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정책 항목으로 꼽혔다.

서울시장 후보들, 생활형 공약 예고

그렇다면 이를 시민 공약으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12월17~22일 서울시민 릴레이 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와 시민은 10대 어젠다를 놓고 의견을 쏟아냈다. '우리 시대 청년이 말하는 청년 일자리' 토론회에 전문가 패널로 참석한 이승호 한국청년센터 운영위원장은 "청년고용촉진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청년 미취업자 채용 의무화(3%) 대상 기관을 지방 공기업까지 확대하게끔 한 청년고용촉진특별법이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상정돼 있다.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조례 제정 등을 통해 이를 강제할 수 있게끔 시장 후보자들에게 구체적인 요구를 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시민 패널인 장경태씨(연세대 대학원생)는 정부가 청년실업 문제에 시혜적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다며 "청년 취업은 사회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다. 중앙·지방 정부는 취업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리 보장을 위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교육 문제를 놓고 벌인 '강남 아줌마와 강북 아줌마가 만났다' 토론회에서도 열띤 논전이 오갔다. 토론회를 시작하기 전만 해도 주최 측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고 한다. 강남과 강북 간 인식 차로 인해 토론에 난항을 겪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사는 곳은 중요하지 않았다. 강남·강북 학부모는 한목소리로 불안감을 호소했다. 강남 주부 이은영씨는 "한국에는 엘리트주의는 없고 엘리트 코스만 있다"라고 꼬집으며 "그렇지만 엘리트 코스에 편승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만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사교육비를 지출해야 한다"라고 말해 강북 엄마들의 공감을 샀다.





2009년 10월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2010시민매니페스토만들기 추진본부' 출범식이 열렸다.

공교육을 살리고 교육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이견은 없었다. 강서구에 사는 주부 안남숙씨는 서울시장에 나올 후보자들이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공교육 강화를 위한 교육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과세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선거 때부터 이를 용기 있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 패널로 참석한 김석현씨(강서구)는 "같은 강서구 내에서도 빈부 격차가 크다. 새 서울시장이 급식 문제에서라도 아이들이 차별을 느끼지 않게끔 무상급식을 시행한다고 공약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매니페스토가 정착된 나라일수록 '생활형 공약'이 많아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정치인이 그만큼 시민 눈높이에 맞춰 정책을 만들려고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후 60년 만의 정권 교체로 화제를 낳은 일본 민주당 또한 '생활을 위한 정치'를 공약으로 내걸었다(상자기사 참조).

'서울형 복지'를 임기 내 최대 치적으로 꼽는 오세훈 현 시장을 비롯해 올해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후보들도 '요람에서 무덤까지'(진보신당 노회찬) '서울시 출산율을 1.01명에서 2.1명으로'(민주당 이계안) 등 생활밀착형 공약의 탄생을 잇달아 예고하고 있다.

이광재 사무처장은 "2000년대식 낙천·낙선운동은 이미 한계에 부딪쳤다. 2010년에는 시민의 요구를 공약으로 적극 수렴하려는 정당과 후보자를 유권자가 지지하는 새로운 선거 문화가 싹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낙관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8개 선거(시·도지사,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지역구 및 비례대표, 기초의원 지역구 및 비례대표, 교육감, 교육위원)가 동시에 치러진다는 것, 둘째는 지지 후보와 정당에 동시 투표하는 1인2표제가 적용된다는 것, 셋째는 정책공약집 공개 의무화 등 매니페스토 관련법이 처음 적용되는 지방선거라는 것. 이런 변화로 인해 인물만으로 투표 대상을 판단하기 어려워진데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번에 서울시민이 원하는 10대 정책 어젠다를 발표한 2010시민본부는 광역단체장 및 교육감선거 예비 후보 등록이 시작되는 2월2일 이전까지 나머지 16개 시·도에서도 주민이 뽑은 정책 어젠다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단 정책 선거가 성공하는 데 전제 조건은 있다. 청년 일자리 토론회에 참가한 한 패널은 "이대로 가만있으면 계속 당하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88만원 세대의 투표율을 88%로 끌어올리는 운동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2010년 선거 향방은 결국 유권자의 각성에 달려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시민토론회에 쏟아진 말말말
청년 일자리
"당연히 중앙·지방 공기업부터 청년 일자리 쿼터제를 도입해야죠. 20대의 도전정신을 탓하기에 앞서 대학생 벤처 창업자들이 생산한 물품을 공공기관에서 5% 의무 구입해주는 식의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고요. 이런 소박한 요구마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요?"(장경태·연세대 정치대학원 재학 중)

"국내 기업에만 의존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글로벌 일자리 창출에 정부와 서울시가 앞장서 주세요."(지정현·숭실대 4년 재학 중)

"하다못해 토익 응시료라도 정부가 부담해주면 좋겠어요. 취업을 위해서는 일정한 스펙에 도달할 때까지 토익을 보는 게 필수인데, 매번 3만9000원씩 응시료를 지불하는 게 큰 부담이에요."(조성권·숭실대 4년 재학 중)

교육
"우리 교육의 문제는 모든 아이가 엘리트 코스를 밟아야 하는 거라고 봐요. 그러면서 실상 제대로된 엘리트 교육은 없죠. 저도 제 아이가 엘리트라고 판단하진 못하지만 그 코스에 편승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무리한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있어요."(이은영·강남구 주부)

"교육 문제로 고통받는 데는 강남·북이 따로 없어요. 강남 학부모나 강북 학부모나 입학사정관제가 사교육비를 증가시킬 거라 보고 불안해하고 있어요. 지역 내 교육 불균형 문제가 심화되는 것도 걱정스럽고요."(성해옥·강남구 주부)

"공교육 강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과세가 필요하다고 선거 때부터 후보들이 용기 있게 선언했으면 좋겠어요. 공교육과 공보육 강화하자는 데 좌파·우파 이데올로기 다툼이 뭐가 필요한가요."(안남숙·강서구 주부)

주거

"시프트 제도는 좋긴 한데 역세권 지가가 너무 높아 실행이 불가능하다고 봐요. 그보다는 재건축 임대아파트 비율을 부활시키고 용적률 등에서 주민에게 인센티브를 줘야 하지 않을까요?"(성흥구·강남구 방배3동 주민자치위원)

"선거에서 표 좀 얻자고 있는 자와 없는 자로 편가르기할 게 아니라 주택청 같은 중재기구를 두었으면 좋겠어요. 서민을 위한 주택정책에서만큼은 후보들도 마음을 비우고 접근해줬으면 합니다."(박찬일·마포구 용강시민아파트 세입자 권리찾기모임 대표)

"20년도 안돼 왜 멀쩡한 주택을 때려부숴야 하나요? 모든 재개발·재건축은 왜 아파트가 중심이 돼야 하나요?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나 아름다운 서울을 위해서도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김숙중·강동구 상일동 주민자치위원)

김은남 기자 /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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