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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부의 대응전략 갈팡질팡… 항바이러스제 처방 방침 수시로 바뀌고 예방접종도 시기 넘겨 | ||||||||||||||||||||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헌법 36조 3항은 이렇게 국가의 의무와 국민의 건강권을 명시하고 있다. 사회적 질병인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엔 공공성이 더욱 요구된다. 공공보건에 해당해 각별히 국가의 의무가 강조된다는 뜻이다. 만약 위험의 경고에도 정부가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다. 신종 인플루엔자의 대유행에 대한 경고는 짐작보다 전부터 있었다.
항바이러스제 비축량 9월까지 인구의 5%뿐
2005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는 독감 유행에 대한 대책을 각국에 촉구하며, 개정된 대유행 지침을 발표했다. 이에 한국 정부도 2005년 8월 ‘신종 인플루엔자 대비·대응 계획’을 마련했다. 그러나 계획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2006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는 1천만 명분의 항바이러스제(경구용 캡슐제 타미플루+흡입제 리렌자) 비축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공허한 소리로 남았다. 오히려 2009년 예산에서 신종 인플루엔자 관련 10여 개 항목 25억원 예산이 삭감됐다. 내용을 보면, 항바이러스제 예산은 2008년 111억원에서 2009년 91억원으로 줄었고, 중증신종전염병 격리병상 확충 예산도 2억7천만원 삭감됐다. 최은희 진보신당 서울시당 신종 플루 대책위원장은 “안전행정 개념이 없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이르면 2005년, 늦어도 올 초엔 항바이러스제 비축 등 신종 인플루엔자 대책을 적극 마련했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준비된 사회는 피해의 최소화로 이어진다. 신종 인플루엔자 치료에 필수인 항바이러스제 비축량은 간접적 예방의 효과도 가진다. 변진옥 ‘이윤을 넘어서는 의약품 공동행동’ 정책위원은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한 환자는 바이러스 체외 유출이 적어져 전염성도 낮아진다”며 “항바이러스제는 사망률뿐 아니라 전파의 확산도 줄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거듭된 경고에도 한국 정부의 항바이러스제 비축량은 지난 9월까지 인구의 5%(약 200만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대부분의 선진국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인구의 20% 이상분을 비축해두었다. 항바이러스제 부족은 이번 신종 플루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신종 플루 사태 전에 인구의 50%, 올 4월 이후엔 인구의 80%가 복용할 항바이러스제를 비축한 영국은 7월부터 상담원 1500명을 두고 인터넷 핫라인을 통해 증상이 확인되면 타미플루 처방을 허용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항바이러스제를 광범위하게 사용한다는 초기의 방침에서 신종 플루 확산의 고비인 가을철을 앞둔 8월21일 노약자 등 고위험군과 입원환자에게만 처방을 허용하는 방침으로 바꾸었다. 다시 9월에 들어 의심환자 대부분에게 처방을 허용했고, 10월 말에는 거점 약국뿐 아니라 일반 약국에도 타미플루를 공급했다. 그리고 뒤늦게 항바이러스제 추가 구입에 나서 10월까지 항바이러스제 300만 명분을 확보해 인구의 11%에 해당되는 비축분을 채웠다. 다시 10월 말에 정부는 항바이러스제를 인구의 24%선까지 확보하는 계약을 마쳤다고 밝혔다. 우석균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신종 플루는 그대로인데, 대응전략만 갈팡질팡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영국, 캐나다 등은 인구의 100%에 대한 백신을 확보한 상태다. 캐나다는 다국적 제약회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에서 11월부터 5천만 회 접종 분량의 백신을 공급받는다. 캐나다는 뼈아픈 교훈을 거울 삼아 백신 확보를 미리 준비했다. 1976년 돼지 인플루엔자 당시에 미국이 공급하기로 했던 백신을 주지 않자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 여기에 조류 인플루엔자 등을 통한 경보도 영향을 끼쳤다. 캐나다는 2000년대 초부터 다국적 제약회사의 백신공장을 유치하고, 자국에 생산량을 우선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한국 정부는 지난 6월에도 평소와 같은 방식으로 백신 입찰에 응해 다국적 제약회사의 거절에 명분을 주었다. 백신의 추가 구입에 들어간 비용을 미리 백신 생산시설 확충에 돌렸다면 훨씬 경제적 효율성이 컸을 것이란 분석이다.
거점병원 지정할 법적 근거도 부족해
그리고 의료체계도 시험에 들었다. 신종 플루 감염을 차단할 음압시설을 갖춘 격리병실이 전국에 39개, 격리병상은 197개에 불과하다. 신종 플루 중증환자가 대량 발생하면 이들을 치료할 병실이 부족한 것이다. 질병관리본부가 8월26일 신종 플루 거점병원으로 지정된 455개 병원 중에 23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격리치료를 위한 별도 공간을 확보하지 않은 의료기관이 7개에 달했다. 그나마 조사 대상은 대형 병원인데, 거점병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소 병원의 상황은 더욱 열악할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에 비워둘 가능성이 상당한 격리병상을 확충할 이윤 동기가 부족한 것이다. 서울대병원 등이 당초 거점병원 신청을 하지 않은 것에서 보듯, 거점병원을 지정할 법적 근거도 부족해 병원이 지정을 거부하면 제재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신종 플루뿐 아니라 결핵의 확산에서 보듯 다시 전염병이 돌아왔지만 법체계는 뒤떨어져 있다. 전염병예방법, 검역법, 의료법 등으로 신종 전염병 대응 근거 법규가 쪼개져 있어 정부 차원의 대응이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공공병원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74%에 견줘 8%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법안 정비, 의료 공공성 강화가 절실하다. 그러나 여전히 신종 플루 위기 돌파는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다. 거점병원에서 신종 플루 확진검사를 받으려면 검사·진료·특진비를 포함해 약 15만원이 든다. 4인 가족 검사비만 60만원에 이르는 것이다. 최은희 대책위원장은 “10월 말 현재 대략 50만 명이 검사를 받았다고 추정하면 사회적 검사비만 700억~800억원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신종 플루로 입원할 경우 1인 병실 비용도 더해진다. 그래서 중증질환처럼 신종 플루 확진검사의 본인 부담을 10%로 낮추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금껏 신종 플루 확산을 버텨온 힘도 개인이 위생에 애쓰고 과중한 의료비를 부담한 것에서 대부분 나왔다. 마치 경제위기 때마다 허술한 사회적 안전망 대신에 가족의 희생과 개인의 노력으로 위기를 돌파해온 ‘신자유주의 모델’을 반복하는 것이다.
유전 치료, 무전 방치
여기에 신종 플루 양극화도 더해진다. 만성질환을 앓는 고위험군의 상당수가 저소득층이다. 보건의료단체는 이들의 신종 플루 진단과 치료에 무상 의료를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유전 치료, 무전 방치’의 양극화가 초래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신종 플루 양극화는 이미 지역적 격차를 통해 엿보인다. 지난 9월4일까지 서울시 자치구별 확진환자 및 항바이러스제 처방 현황을 보면, 강남구와 강서구의 차이는 극명하다. 강남구(인구 55만여 명)의 확진환자 수는 74명으로 강서구(57만여 명)의 6명에 견줘 10배를 넘는다. 항바이러스제 처방도 강남구 1375명분, 강서구 167명분으로 8배 이상 차이가 난다. 강남구·서초구·송파구 등 이른바 ‘서울 부자 자치구’ 3곳이 모두 확진환자 상위 5개 구 안에 포함됐다. 반면에 강서구·중랑구·중구·광진구·강북구 순으로 확진환자가 적었다. 이 자료를 담은 진보신당 서울시당 정책보고서는 “신종 플루 감염이 의심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정보의 문제’, 이를 바탕으로 시간을 내서 보건소나 거점병원에 갈 수 있는 ‘여유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정보와 병원의 접근성이 높아서 확진환자도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서는 “하위 5개 자치구에 ‘드러나지 않은’ 확진환자가 많을 수 있다는 역설”을 지적한다. 이런 현실에서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 이동진료차를 배치하는 등 지원이 절실하다. 그러나 세상은 거꾸로 돌아간다. 65살 이상 주민을 대상으로 한 무료 계절독감 예방접종을 강남구·관악구 등 서울의 일부 자치구가 민간 바우처 방식으로 돌렸다. 보건소에서 해오던 예방접종을 민간 의료기관에 맡기고 한 명당 1만8천~1만9천원가량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 관악구에서 일부 노인들이 원하는 시기에 접종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09년 미리 구입한 정부의 계절독감 백신 가격은 7천원이었지만, 신종 플루 사태로 백신 가격이 1만원 이상으로 오르면서 민간 의료기관이 인상된 가격으로 백신을 사야 했고, 결국 진료비 등을 포함하면 수지가 맞지 않아 민간 기관이 접종을 꺼리는 일이 생긴 것이다.
서울 강남·송파구 유독 처방 많아
이렇게 전염병 예방 등 공공의료 강화가 필요한 시기에 오히려 정책의 흐름은 거꾸로 흐른다. 정부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진다. 다른 자치구에 견줘 강남구와 송파구(1409명분)가 유독 항바이러스제 처방이 많은 통계에 대한 의혹도 있다. 일부 힘센 구민이 만약을 대비해 타미플루를 미리 챙겨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의혹에 심증을 더하는 사건도 있었다. 지난 9월16일 강남구의회 의원들이 해외연수를 가면서 신종 플루 증상이 없는데도 타미플루를 처방받아 가져가 ‘특혜’ 눈총을 받았다. 최근 고위층에 주는 선물에 타미플루가 필수품이란 얘기도 떠돈다. 신종 플루 사태를 맞아서, 사회의 바닥과 인간의 바닥이 드러나고 있다.
※ 참고 문헌 <신종 플루 확산 어떻게 막을까?>(우석균), <2009 Swine Infulenza A 대유행의 원인과 대응>(박상표), <신종플루가 가진 위험의 본질:치료제 독점>(변진옥), <캐나다의 Infuenza A 대응>(정혜주·캐나다 토론토대 박사과정), <신종 플루 대유행 시기 서울시 대책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제안>(진보신당 서울시당 정책보고서)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2009.11.06 18:22
전염병이 개인의 질병인가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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