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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새벽 4시50분에, 회의장 아닌 곳에서… 하나의 당이 의회 전체를 독식하는 구조 깨야 | ||||||||||||||||||||
“국민은 오직 선거 기간에만 자유롭다. 선거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노예로 돌아와야 한다.” 장 자크 루소는 오직 ‘표’를 행사할 수 있을 때만 주권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이런 말로 지적했다. 제주도민들은 이 한계를 온몸으로 부정하고 있다. 주민 뜻을 거스르고 해군기지 유치 등을 추진하는 김태환 제주도지사를 끌어내리려고 주민소환투표를 발의한 것이다. 제주의 실험은 성공할까?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김 지사가 민의를 거스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배경의 하나가 제주도의회의 견제 기능 상실이라는 사실이다.
전국적으로 강고한 지역주의 탓에 자치단체장의 소속 정당과 지방의회 다수당은 대개 같다. 이해관계가 일치하거나 서로 ‘제 식구’라는 인식이 깊다. ‘민주주의의 뿌리’라는 지방자치의 영역에서부터 행정권력과 이를 감시해야 할 입법권력이 서로 밀어주고 눈감아주는 일이 쉽게 벌어지는 구조인 것이다. 이 때문에 7월22일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저지른 미디어법 날치기와 같은 일이 지방의회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이의 있습니까?” “이의 있습니다” “가결을 선포합니다”
경기 안산시의회는 지난 7월11일 ‘2009년 공유재산관리계획변경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변경안은 시유지인 초지동 20만5783㎡(6만2300평)를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해 돔구장과 주상복합아파트 등을 짓겠다는 한나라당 소속 박주원 시장의 구상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시는 안산도시공사에 부지를 현물출자하고 공사는 민간사업자를 공모해 이 땅과 돔구장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1조3천억원 규모의 재원 일부를 충당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201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전까지 공사를 끝내 대회를 유치하는 한편 프로야구단도 유치하겠다고 했다.
박주원 시장과 한나라당 의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7월10일 열린 정례회 본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은 시정질문 시간을 최대한 이용해 ‘지연작전’을 펴며 변경안 상정을 막아보려 했지만, 한나라당 소속 심정구 의장은 밤 12시를 넘겨 차수를 변경하면서까지 회의를 계속했다. 11일 새벽 3시5분 심 의장은 결국 변경안을 본회의에 올렸다. 한나라당은 13명, 야당은 민주당(8명)과 민주노동당(1명)을 합쳐도 9명. 표결하면 가결될 게 뻔했다. 야당 의원들이 “사업 타당성을 심도 있게 논의하자”며 거세게 반발해 회의가 중단됐다. 잠시 뒤 심 의장이 회의를 속개하려 하자 야당 의원들은 의장석을 점거했고, 이들을 끌어내려는 여당 의원들과 거친 몸싸움이 일어났다. 그 사이 심 의장은 의장석 주변에 서서 “(변경안 통과에) 이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의 있다”는 야당 의원들의 아우성과 여당 의원들의 대거리에 회의장은 더욱 아수라장이 됐다. 심 의장은 “원안대로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라고 말한 뒤 회의장을 떠났다. 야당이 분명하게 반대 뜻을 밝히는데도, 표결조차 거치지 않은 채 변경안이 날치기 처리된 것이다. 새벽 4시50분이었다.
야당 의원들을 따돌린 채 회의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조례안을 통과시킨 일도 있었다. 한나라당 소속인 경기 군포시의회 김제길 의장은 지난 2007년 4월16일 시설관리공단 설립 조례안을 본회의에 직권상정했다. 시설관리공단을 설립해 그간 시가 직접 운영하거나 민간에 맡겼던 여성회관·군포문화센터·청소년 수련시설 등을 이관하는 조례안으로, 같은 당 소속 노재영 군포시장의 공약 사항이었다.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 4명은 “운영에 전문성이 필요한 문화·복지 시설을 시설관리공단 아래 두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반대했다. 이들이 의사봉을 빼앗고 단상을 점거해 회의가 지연되자 김 의장은 한나라당 의원들과 함께 본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이미 같은 해 2월과 4월13일 두 차례 부결된 경험 탓이었을까. 김 의장을 포함한 한나라당 소속 시의원 5명은 회의장에서 30여m 떨어진 의장실에서 ‘만장일치’로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열린우리당은 대법원에 조례안 무효확인소송과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표결은 회의장에 있는 의원이 하는 것이므로 의장실에서 한 표결은 무효”라는 논리였다. 자치단체의 조례 입법 과정을 놓고 대법원에서 다툼을 벌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군포시의회 회의 규칙은 “표결할 때 회의장에 있지 아니한 의원은 표결에 참가할 수 없다”고만 돼 있어 ‘회의장’이 꼭 ‘본회의장’을 의미하는지가 명확지 않았던 탓이다. 패소한 야당은 회의 규칙 개정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한나라당의 숫자에 밀렸다. ‘반전’은 최근에 일어났다. 경기 성남시의회 등 다른 지방의회에서도 회의장을 바꿔 날치기를 시도하는 일이 계속되자 시민사회에선 “지방자치법에 날치기 방지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결국 올해 4월 “지방의회에서 표결할 때에는 의장이 표결할 안건의 제목을 의장석에서 선포해야 한다. 표결이 끝났을 때에는 의장은 그 결과를 의장석에서 선포해야 한다”는 지방자치법 64조 2항이 신설됐다.
올 4월에야 의장석에서 표결 결과 선포 법제화
그래도 특정 정당의 압도적인 수에 기댄 ‘유사 날치기’는 막기 어렵다. 지난 7월10일 경기도의회가 소외지역 초등학생 15만3520명을 대상으로 한 무상급식 지원 예산 171억여원을 전액 삭감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진보 성향의 첫 교육감으로 주목받는 김상곤 교육감이 무상급식 지원 예산안을 내놓자 경기도 교육위원회는 6월23일 형평성 등을 이유로 금액을 절반으로 깎아 경기도의회에 제출했다. 도의회 교육위 소속 한나라당 의원들은 한술 더 떠 무상급식 정책을 “좌파주의적 이념”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7월10일 이마저도 전액 삭감해버렸다. 교육위 소속 의원 13명 가운데 11명을 차지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내린 결정이었다. 7월22일 도의회 본회의에선 도의원 117명 가운데 민주당·민주노동당 의원 13명이 찬반토론 끝에 항의 표시로 모두 퇴장했다. 재석 의원 92명은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었고, 이들은 전원 찬성으로 무상급식 지원 예산 전액 삭감안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밥 굶는 아이들이 있다면 무상급식이 맞지만, 경기 지역에 밥 굶는 아이는 전혀 없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지난해 7월 서울 관악구의회에선 미국산 쇠고기를 단체급식에 사용하지 말자는 결의안을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가, 한나라당이 보름 만에 이를 뒤집은 일도 벌어졌다.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 논란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구의원 22명 가운데 한나라당이 13명, 민주당이 8명, 민주노동당이 1명으로 한나라당이 과반을 차지했지만 “주민들 먹을거리 문제니 중앙에서처럼 정치적 논리를 들이대지 말자”는 야당의 설득에 한나라당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결의안이 통과되자 관악구청이 반발했다. 일부 보수 언론은 “한나라당이 다수인 관악구의회가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정부 입장과 정면 배치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파문이 일고 있다”는 취지로 보도했다. 결국 관악구의회는 8월4일 임시회를 소집해 한나라당 의원 전원 찬성으로 결의안을 취소해버렸다. 결의안을 발의한 이동영 민주노동당 의원은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결의안을 어떻게 보름 만에 뒤집을 수 있느냐고 따졌지만 소용 없었다”며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이 서울시당이나 중앙당의 공천 압력 때문에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94%, 부산 95%, 대구 97%…
도대체 특정 정당 독식이 어떤 지경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까? 서울시의회의 경우 전체 의석(102석)의 94%인 96석이 한나라당 차지다. 부산시의회는 45석 가운데 95%가 넘는 43석이 한나라당, 대구시의회는 29석 가운데 28석(97%)이 한나라당 몫이다. 광주시의회는 18석 가운데 17석(94%)이 민주당이다. 경기도의회는 117석 가운데 86%인 101석이 한나라당, 전북도의회는 37석 가운데 35석(95%)이 민주당 차지다. 팔이 안으로 굽는 탓에 나쁜 짓을 저질러도 외부로 새나가기 어렵고, 이심전심으로 ‘일’을 꾸미기 좋은 구조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을 돌파할 방법은 없을까? 일부 시민단체와 학자들은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종률 민주당 의원 등 일부 국회의원은 정당공천제를 폐지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내놨다. 자치단체장·지방의원 공천을 사실상 지역구 국회의원이 좌우하기 때문에 공천을 받으려는 사람이나 당선된 사람이나 지역 주민이 아니라 국회의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이유다. 사실 시·군·구 단위 기초의원으로까지 정당공천이 확대된 것은 시·도 광역의원 정당공천이 허용된 지 15년 뒤인 2006년 지방선거부터였다.
하지만 지방의회에서 드러나는 모든 문제를 정당공천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의견도 많다. 유권자가 후보를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정당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는 “짧은 선거운동 기간에 정당이란 꼬리표를 떼면 유권자는 누가 누구인지 판단할 정보를 얻을 기회를 잃는다. 더구나 유권자는 후보가 바뀌어도 지속되는 정당과의 신뢰관계 속에서 투표하는 경향이 있는데, 후보 개인과는 그런 신뢰의 경험을 지속하기 어렵다. 정당공천제마저 폐지하면 현재 40%대에 불과한 지방선거 투표율은 더욱 낮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처럼 정당의 책임정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보는 쪽에선 공천 과정에 시민배심원제나 아래로부터의 경선을 도입하는 등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정 정당의 독주를 깨려면 합리적인 선거구 획정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1개 선거구에서 2~4명을 뽑는 시·군·구 기초의원의 경우, 현재 선거구 1027개 가운데 60%가 넘는 607곳이 2명을 뽑는 선거구여서 거대 정당의 독식에 유리하다. 한 정당이 같은 선거구에 복수로 후보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지역기반이 튼튼한 정당에서 당선자 2명을 모두 배출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200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별 선거구획정위원회가 4명을 뽑는 선거구 160곳을 제안했지만, 지방의회에서 조례로 선거구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39곳을 빼고 모두 날치기 시비 끝에 2인 선거구로 쪼개졌다. 대구 11곳을 비롯해 서울·인천·대전·경기에서 4인 선거구가 모두 사라졌다. 한 곳에서 4명을 뽑는 것보다 2명을 뽑는 것이 지역을 독식하는 정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와 진보정당은 지역 독점 구조를 깨는 중선거구제의 본질을 훼손한다며 반발했지만 기득권은 강력했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진보정당이 선거구 획정 논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도 2인 선거구가 더 확대되거나, 기득권을 쥔 현직 의원과 거대정당이 4인 선거구를 입맛대로 2인 선거구로 쪼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시 선거구획정위의 경우 동 통합과 인구 변동으로 성동·동대문·중랑·서대문·송파·구로·강남구의 의원 정수와 선거구 조정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노원·마포·은평구는 선거구별로 인구 대비 구의원 수의 편차가 큰데도 선거구 조정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진보정당 쪽은 인구 비례 등을 고려할 때 이 지역이 3인을 뽑는 선거구로 조정돼야 하는데 논의조차 않는다고 불만을 터트린다. 3인 선거구는 2인 선거구보다 소수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고, 4인 선거구처럼 손쉽게 둘로 쪼갤 수도 없어 진보정당이 선호하는 편이다. 여기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기초의원을 선거구 1곳에서 1명만 뽑는 소선거구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펴고 있어, 아예 소수당의 진출 가능성 자체를 막으려 한다는 의심도 거두지 못하는 상황이다.
합리적인 선거구 획정 시급
이런 의심과 논란을 잠재우려면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정상적으로 운영돼야 한다. 공직선거법 등을 논의할 정치개혁특위는 지난 6월 첫 전체회의를 열었지만, 미디어법 날치기로 정국이 꼬이면서 예정했던 공청회조차 열지 못하는 상황이다. 김충조 국회 정치개혁특위 위원장은 “기초의원 선거구제 문제는 정당공천 배제 여부와 함께 특위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내용”이라며 “8월 중순 이후 속도를 내면 9월까지 마무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찬반 논란이 팽팽해 쉽게 결론 내리긴 어렵겠지만,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이 독식하는 구조를 깰 수 있는 방법을 내놓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
2009.08.15 21:50
지방의회는 날치기로 날새는 중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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