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올곧게 몸은 낮게. 5ㆍ31 지방선거 낙방한 윤난실
이 글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낙선한 후 작성된 기사입니다. <출처-전라도닷컴 2006.6.26>
짜장이냐, 짬뽕이냐! 짜장을 택하자니 짬뽕국물이 울고, 짬뽕국물로 기울자니 달달한 춘장맛이 혀끝에 맴도는 중국집에서의 갈등은 배가 불러오는 순간 대충 끝이 나는 법이다. 허기를 달래고 나면 뱃속의 것이 짬뽕이든, 짜장이든 별로 중요치 않으니까.
하지만 두고두고 쓰라리고 뼈아프며, 뒷맛 씁쓸한 선택의 뒤끝도 있다. 지나간 5·31지방선거의 뒷맛이 그러하다. 마치 신랑 신부 얼굴은 보지도 않고서 식권 챙겨서 맛없고 영양가도 없는 밥을 먹어치우는 결혼식 하객들을 보고 난 기분이랄까.
분명 지방정치 일꾼을 뽑는 선거였건만 못질을 할 일꾼인지, 대패질을 할 일꾼인지도 보지 않은 채 치러진 무작위성 투표, 그렇게 변별력 없는 선택을 거치고 나니 어이없게도 일 잘해온 괜찮은 일꾼들을 일터에서 내모는 사태가 빚어졌다. 유권자의 권리가 성실히 일해 온 일꾼들을 명분도 없이 쫓아내는 데 쓰이다니!
![]() |
사람살이 고통 가슴으로 읽어내는 섬세함
그렇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어이없는 통보를 받은 대표적 일꾼이 윤난실이다. 유권자의 한 사람이었던 나 자신을 악덕기업주처럼 느껴지게 하는 물갈이. 정치물결의 쓰나미를 겪은 그의 심정은 어떨까.
“괴로운 것은 나 자신의 당락이 문제가 아니라 장애인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런 소외계층의 이해를 대변할 단 한 석도 확보하지 못했는가, 하는 부분이지요.”
아이 젖도 제대로 못 먹이고 쫓겨난 어미의 심정 비슷한 걸까. 두고 온 일터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는 그의 깊은 눈빛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비례대표 의원이었으니 선거는 처음이었죠. 명함 건네는 것부터 죽을 맛이죠. 명함을 거절하면 존재를 거절당한 것 같아서 얼굴이 벌개지고. 그런데 광천동 재개발 지역을 돌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아이를 들쳐업고 오갈 데 없어질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애엄마, 힘없는 노인들. 130명을 인터뷰하는데, 그때 가슴 깊은 곳에서 ‘정말로 의원하고 싶다!’ 하는 생각이 뜨겁게 올라왔어요.”
얼핏 감상적으로 들리지만 그가 노동운동진영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뛰어온 현장 운동가 출신이면서도 과격해 보이지도, 빡빡한 원칙론자처럼 보이지도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싶어졌다. 원칙과 당위에 따라 움직여 왔지만 가슴이 시키는 것을 외면하지 않는 ‘진정성’, 사람살이의 고통을 가슴으로 읽어내는 섬세함이 이 사람의 동력이구나 싶은.
“사람이 먼저죠. 예술단체에서 해고당한 예술노동자들의 문제에 직면한 적이 있었어요. 그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더 시간 끌면 사람이 망가질 수도 있겠구나 싶은 순간이 있더라구요. 그때 생각했죠. 아, 해고자 문제는 당사자의 고통에서 바라보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시장에게 면담요청을 하고, 복직약속을 지키라고 했어요. 다음날 정말로 시장실로 그 노동자들을 데리고 갔어요. 복직이 성사됐죠. 당에서 비판을 받았지요. 원칙을 저버린 그런 일처리가 말이나 되느냐고!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어찌 보면 이처럼 못말리는 다혈질 기질이 있구나 싶은데도, 그의 모습엔 불안한 구석이 없다. 자기주장이 분명하되 결코 건방져 보이지 않고, 주저함 없이 일을 풀어가는데도 경솔해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기에 이렇게 얽매임 없는 단호함을 체화시킬 수 있었을까.
![]() |
방직공장, 메리야스 공장 등 현장운동가 이력
강진군 칠량면이 고향인 그는 5·18 마지막 수배자인 윤한봉의 조카다. 윤한봉씨 말고도 아버지 형제분들이 모두 트인 분들이었다.
“우리 아버진 농사꾼이었지만 영어는 제국주의 언어니깐 공부하지 말라고 하시는 분이었어요. 작은아버지들이 전부 농민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분들이시고 우리 할머니는 얼마나 통이 크고 담대한 분이셨던지 작은 아버지가 밀항을 한 고통의 세월도 꿈쩍 않고 버티셨죠. 어릴 때부터 여자라고 차별을 받아본 적도, 아이라고 끼여들지 말라는 법도 없었죠. 밥상머리에서도 정치토론이 자연스럽게 벌어졌어요.”
민족문제연구소 윤한봉 소장과 교육운동에 앞장섰던 윤광장 선생, 작은아버지들은 말귀 잘 알아듣는 범생이 맏조카를 각별히 사랑해주었다. 공부도 곧잘 했던 그는 선생님이 되어 살아갈 요량으로 광주교대에 진학을 했다.
“니가 벌어서 동생들은 가르치라는 어머님 말씀을 가슴에 안고 광주교대에 갔지요. 하지만 교직은 끝내 가지 못한 길이 되고 말았어요.”
전두환 정권시절, 교육대생들에게는 공수부대로 직접 들어가서 받아야하는 군사훈련이 필수였고, 군사훈련을 거부한 그는 무기정학을 당했다. 어렵게 복학이 됐지만 군사훈련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자퇴서를 썼다. 그리곤 노동야학인 바램야학에서 노동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동생들 학비 대고, 부모님께 월급 보내는 어린 여공들을 야학에서 만났죠. 아, 나도 일신방직에 취직했는데 육체노동을 감당 못하고 나가떨어졌어요. 세상에, 일을 못버틴 거예요. 그때의 부끄러움이 평생 갚을 부채로 남더라구요.”
그 뒤로 메리야스 공장에 취직해 일을 버텨냈다. 현장노동자에서 노동단체 활동가로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당조직을 만드는 일꾼으로 뛰었다. 전노협과 민주노총을 거치며, 2002년에는 비례대표제의 도입에 따라 민주노동당 광주시의회 의원이 되었다.
![]() |
‘밥값하는 의원이 되어야겠다’는 다짐
<의회 첫날, 나는 별로 밥값을 못한 것 같다. 오늘 나는 시민의 세금인 회의수당 8만원을 받게 될 것이다. 호텔에서 내 돈 내지 않고, 비싼 점심도 먹었다. 밥값하는 의원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2002년 7월9일, 의원이 된 후 첫 의회가 열리던 날 그가 남긴 기록이다. 의원직은 그에게 ‘자리’가 아니라 ‘역할’이었던 것이다.
“시의원 연찬회를 하는데 출입기자단은 동참해 촌지를 받고, 의회는 시장과 시교육청에서 찬조금을 받데요. 내가 느낀 것들을 기록해 홈페이지에 의정보고로 올렸어요.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내부고발자라는 딱지가 바로 붙데요.”
관행의 벽은 생각보다 두터웠다. 아무리 정중하게 거절해도 상품권을 놓고 나가는 교육청 직원의 뒷덜미에 우악스럽게 상품권을 내던진 적도 있었다. 어렵고 외로운 저항에만 재미를 붙인 게 아니라 가장 많은 정보를 요청하는 의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시민사회단체로부터 가장 쓸만한 의원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밥값하는 의원이 되기 위해 관행과 싸워온 결과였다.
“결식아동 통계를 발표하고 난 뒤에, 지역은행 노조가 결식아동돕기 호프를 했어요. 전교조 선생님들보다 먼저 나선 거죠. 그런 순간에 운동을 돌아보게 되죠. 조직운동이 놓치고 가는 게 무엇인가. 물론 그렇게 해서 결식아동문제가 해결되겠냐고 물으면 할 말 없지만, 아이들의 고픈 배를 아파하지 않고서는 운동이 해낼 일이 없다고 봐요. 제도를 바꾸려면 가슴 속 따스함이 같이 가야죠.”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어떤 일도 미리 정해둔 잣대로 재지 않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 악착스럽게 버텨온 4년의 고군분투 끝에 그는 ‘뺏지’를 뗐다. 그가 숱하게 만나온 해고노동자들처럼 하루아침에 일터에서 밀려났다. 갑자기 실업자가 되었는데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두렵고도 설레죠. 일단 하던 일에서 손을 떼야 하는데, 일로 갚아야 할 빚들이 무겁게 따라붙네요. 그래서 맘이 무겁고, 하지만 무언가 새로 시작할 수 있어서 설레네요. 새로운 길 위에서 또 살아야 되니까.”
민주노총에서 밀걸레질부터 다시 할까 생각중이라며 씽긋 웃는 그를 바라보자니, 언젠가 그가 홈페이지에 올려둔 글이 떠올랐다.
<민감하되 튼실하자! 중심을 분명히, 마음을 올곧게! 주장은 분명히, 몸은 낮게! 주저함은 없되, 생각은 넓게 깊게!>
민감하되 튼실하게 지방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해 오던 사람, 몸을 더 낮췄으되, 분명하고 올곧은 눈길로 세상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을 그의 설레는 시작이 어디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