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면담을 하면서 누차 강조한 것은 주민의견을 수렴하라는 것이었다.
“경기도 재정비촉진심의위원회에 결정고시 신청을 올리기 전에 찬반의견조사를 위한 검토위원회라도 하자. 주민찬반의견조사를 다시 하고 설명회도 좀 해보고 그러자. 주민의견수렴 없이 진행하면 나중에 큰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다.”
시장면담에서 시장과 격론을 벌이며 주민들 입장을 논리적으로 대변해주신 정영섭 고문님은 그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날 감기가 몹시 심하게 왔어요. 앓고 있는데 위원장님한테서 전화가 왔죠. 지금 주민들이 모여드는데 숫자가 많지 않으니까 와달라고. 내가 아프다고 하니 그럼 쉬시라고 하는데, 불안한 마음에 그냥 누워있을 수만은 없어서 옷을 두껍게 입고 갔어요. 갔더니 100여 명은 모였더라구요. 그리곤 시장하고 싸우기 시작했죠.”
몸이 불편하셨지만 그날 정영섭 고문님은 시장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어 놓으셨다.“그 때는 제가 활약을 좀 했어요. 시장하고 막 토론을 하고, 안시장이 뉴타운을 시와 주민들의 ‘공동사업’이라고 하길래, ‘이게 무슨 공동사업이냐? 당신들은 우리가 손해나면 보상해 줄거냐? 무슨 시장으로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 거냐?’라고 밀어붙였죠. 시장은 우물쭈물 했고 논리가 밀리자 결국 우리를 슬슬 피했어요.”
그러던 중 안시장이 “그렇다면 경기도 재정비촉진계획 결정고시 이후에라도 주민찬반조사를 해서 과반이 넘으면 촉진구역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구두로 답변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답을 인정할 수 없었다.
“구두로 하는 약속이 무슨 소용이냐? 정확하게 내용을 작성해서 문서로 내놔라.”
우리의 끈질긴 요구에 결국 고재기 과장이 서면으로 그 내용을 담아 자신의 서명을 넣어 가져왔다. 일단 서면으로 답변을 받았으나 그 내용에 대한 검토와 주민들의 합의가 있어야 했다. 토론을 거듭한 끝에 ‘결정신청을 하기 전에 전제되어야 할 요건 및 이후 구성될 검토위원회의 역할과 찬성의견 요건’을 담은 요구안을 문서로 작성해 대표가 서명하여 제출했다. 그리고 이 요구에 대한 답변을 요청하며 다시 한 번 시장면담을 요구했다.
하지만 시장은 외부행사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시청을 나간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로 밤이 깊어갔다. 김밥 한 줄과 빵 한 조각, 우유로 끼니를 때우고 주민들은 계속해서 시장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정영섭 고문님은 그렇잖아도 감기로 불편한 몸에 힘을 많이 쓰시는 통에 몸을 떨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특히 어르신들의 건강이 걱정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주민들은 당장 뉴타운 취소를 하지 않으면 집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만큼 주민들의 절박함은 컸다. 그러나 주민들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들은 주민들을 에워쌌다. 출동한 의정부경찰서 경비과장은 강제연행을 운운하며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경찰 버스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여경에 구급차, 소방차까지 출동해 있는 상황이었다. 급기야 경찰이 해산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해산하지 않으면 연행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오히려 불을 질렀다. 어르신들이 들고 일어나 “모두 연행해!”라며 소리를 질렀다. 기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경비과장이 움찔할 정도였다. 특히 할머니들은 “다 잡아가보라!”며 완강하게 버티면서 항의를 했다. 결국 경비과장은 두 번이나 경고를 하다가 연행을 포기했다. 주민들 분위기가 워낙 심상치 않은데다가 연로하신 분들이 계단에 걸쳐 앉아 있었는데 경사도 높고 난간도 엉성한 계단에서 연행을 잘못했다가는 큰 불상사가 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했으리라.
일단은 이 자리를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 정영섭 고문님을 비롯한 지도부는 “우리가 분열하면 안 된다. 부족하더라도 지도부 의견을 따라주고 다음을 기약하자”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비록 단서를 달긴 했지만 주민 찬반의견수렴을 하겠다는 답변을 과장명의의 문서로라도 받은 것은 매우 큰 성과임을 주민들에게 설명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내일 다시 시장면담을 하자는 확답을 받았다. 이렇게 주민들을 설득한 후 일단 의정부시청 1차 농성을 해산했다.
주민들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워했지만 사실 이날 문서합의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의정부시장과의 끈질긴 교섭 끝에 “결정고시가 떨어지더라도 뉴타운 찬반조사를 해서 과반수 이상이 반대하면 뉴타운을 제척하거나 취소하겠다”는 공식적인 약속은 투쟁의 성과였다. 주민들의 끈질기고 강력한 요구와 투쟁은 마침내 안병용 시장으로 하여금 뉴타운 사업을 진행하면서 주민의 의견을 묻지 못한 ‘중대한 절차상의 하자’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연일 시장실로 쳐들어가 받아낸 의정부 시장의 이 약속은 이후 투쟁을 이어가고 결국 뉴타운 계획의 취소를 이끌어내는 커다란 실마리가 되었다. 특히 주민들이 반대하면 뉴타운도 안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어낸 것은 의미가 매우 컸다.
주민 몰래 결정고시 신청한 의정부시
1차 농성 다음날인 1월 11일, 아침 9시 반 경에 주민대책위 집행간부들은 서둘러 시청으로 갔다. 정영섭 고문님을 비롯한 몇 분들은 결국 전날 농성 때문에 감기몸살이 심해 몸져누우셨다. 어른들께 못할 짓을 시키는 듯한 죄스러움에 안타까웠지만 병문안도 못한 채 시청으로 향했다.
그날 의정부시 고재기 과장은 “결정고시 신청을 해서 심의위원회에서 확정이 되려면 통상 3~$개월이 걸린다. 결정고시가 4월 8일 이전에 나야하기 때문에 의정부시는 신청을 빨리 할 수밖에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시청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이의환 국장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전에 경기도의회 최재연 의원을 통해 자료를 받아 경기도 내의 다른 지역 뉴타운 계획이 도시재정비 심의위원회에서 심의를 받은 기간을 확인해두고 있었다. 자료에 근거해 우리는 강하게 항의했다. “다른 지역의 사례를 볼 때 아직 2개월의 여유가 있다. 내일 다시 실무자 간에 검토위원회 구성 가능 여부에 대한 세부협의를 하자”라며 교섭을 요구했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흘렀다. 1월 1일 오후 2시, 시청 담당부서와 가진 실무협의에서는 격론과 고성이 오갔다. 우리는 시장과의 면담결과를 이야기하면서 “시장이 의견수렴을 약속했으니 가능한 결정고시가 확정되기 전에 논의했던 과정을 끝내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결정고시 신청 전에 충분히 검토위원회의 구성이 가능하다는 점 역시 강조했다. 그런데 갑자기 도시국장 최규인 국장이 충격적인 실토를 하고야 말았다.
“이미 결정고시 신청을 했다.”
실무협의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최규인 국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의환 국장은 격앙된 목소리로 화를 내며 책상을 두드렸다.
“당신들, 우리를 이렇게 기만하느냐? 그따위로 사업을 추진하니까, 주민들이 반발하는 거 아니냐?”
“두고 보자. 가만두지 않겠다.”
그리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나와 대표들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언성을 높였다.“지금 뭐하자는 거냐? 결정고시 신청을 몰래 하다니. 신청하기 전에 최소한 이야기라도 했어야지, 이미 신청을 해놓고 우릴 가지고 장난치는 거냐?”
“다 필요 없다. 몰래 뒤통수 쳐놓고 무슨 실무협의를 하자는 거냐? 더 이상 실무협의 할 필요 없다.”
공무원들을 닦달하다가 결국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다음날부터 일제히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의정부시의 결정고시 신청을 규탄했다.
“안 시장이 우리를 배신하다니….”
주민들의 배신감과 분노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결정고시 신청 전에 주민의견조사가 가능한지를 검토하기로 하고 바로 다음날 실무검토를 하자던 안 시장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주민 몰래 결정고시 신청을 했다. 이 이중적인 태도에 주민들이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폭발적인 상황에 기름을 끼얹는 일까지 발생했다. 한때는 검토위원회 구성까지 운운하면서 뉴타운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의견을 들어줄 것처럼 말했던 문희상 의원이 난데없이 뉴타운 찬성이 더 많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던 것이다. 주민들은 시장이나 국회의원이나 모두 한통속이라며 기가 막힐 뿐이었다.
1월 21일, 시청 앞에서 집회가 열렸다. ‘의정부시장과 문희상 의원 규탄집회’였다. 의정부를 대표하는 책임 있는 위치의 정치인들이 뉴타운 문제에 대해 얼마나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는지를 규탄하는 자리였다. 이날 1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했다. 이날은 폭력적인 철거에 항의하던 주민들을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진압하다가 6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앗아갔던 용산참사 2주기 바로 다음날이었다.
집회 도중에 그동안 의정부시 뉴타운 사업을 결정하고 추진하는데 직 · 간접으로 관여한 공무원과 정치인들 10명의 명단을 제시하고 주민들이 즉석에서 스티커 붙이기를 통해 ‘뉴타운 5적’을 선정했다. 최종 확정된 뉴타운 5적으로는, 최종 결정을 추진한 안병용 시장, 뉴타운 사업을 기획하고 지정 신청한 김문원 전 의정부시장, 뉴타운 사업 실무책임자인 고재기 과장, 그리고 정치적 책임이 있는 문희상 의원과 의정부시의회 강세창 의원이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