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힙합하는 당직자 ‘윤원필’
앨범 하나 내보려다가 빚쟁이로 몰리다
4층 총각, 윤원필 당원을 몇 번 만난 적은 없었지만, (거의) 만날 때마다 빚쟁이들의 빈축을 사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음반을 제작한다고 미리 판매금을 땡겨 놓고 감감무소식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독촉도 종식되었다. <가정식 백반>이라는 타이틀로 1집 앨범이 나온 것이다.
4층 총각의 1집 <가정식 백반>의 가사집 마지막에는 25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말하자면, 이것은 채권자 명단이다. 이 엔딩 크레딧에는 4층 총각에게 소송을 걸려고 준비 중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이름도 있으니, 웃자고 하는 소리겠지만, 채권자는 채권자였던 셈이다. 채권자 중에는 군대 가기 전에 음반 값을 내고, 제대한 후에 받았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오래 기다리긴 했다. 하지만 (주로) 당원들의 십시일반으로 음반 하나가 탄생할 수 있었으니 마음 한켠이 흐뭇해진다.
힙합 스피릿으로 집회 현장을 누비다
윤원필 당원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시청에서 집회가 있었던 날, 뒤풀이 장소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것인데, 음악을 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음악을 한다고 해서 하얗고 긴 손가락, 말간 얼굴과 가녀린 턱 선을 갖춰야 한다는 선입견은 없지만 (아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선입견이 있는 게 분명하다 ㅠ.ㅠ;;) 자외선에 과다 노출되어 그을린 얼굴, 헝클어진 머리, 경상도 사투리의 윤원필 동지와 음악을 연결시키기는 솔직히 쉽지 않았다.
(음반이 나와서야 알았지만) 윤원필 당원이 래퍼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와 힙합이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좋아한다는 래퍼인 에미넴이 주연을 맡은 <8 마일>을 봐도, 미국 디트로이트의 빈민 계층이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랩 배틀을 벌이지 않는가. 래퍼이자 노동자인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과 반골기질이 소위 ‘힙합 스피릿’이라고 할 수 있으니, 각종 집회에 어김없이 나타나 투쟁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윤원필 동지가 힙합을 선택한 것이 어쩌면 숙명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정작 윤원필 동지가 힙합을 선택한 것은 숙명이라기보다는 실리적인 이유에서였다. 가난한 이민자들이나 흑인들이 돈이 없어도 신체만으로 할 수 있는 힙합으로 놀았듯이, 그도 처음에 단순히 생각했다. 악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몸으로 부딪혀보면 될 거 같아서 힙합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힙합이라고 만만하게 보고 덤볐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결국은 화성악 책을 봐야했고 악보 공부를 해야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힙합을 했다??!
윤원필 당원은 서른 둘, 적지 않은 나이에 힙합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윤원필 동지가 서른 살 때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았는데, 어느 날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엄마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원필아, 너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한 방 맞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에게 지대로 한 방을 맞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스무 살에 했던 고민이 생각났다.
‘마흔이 되기 전까지 3가지를 하겠다. 음반, 만화책, 소설책!’
스무 살 때는 그 세 개만 되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윤원필 동지는 한국 나이로 올해 39세이다. 마흔까지 1년을 남긴 상황에서 이루고 싶었던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이루었다. 훌륭하다! 마흔이 되기 전, 앞으로 1년 안에 만화책과 소설책을 모두 낸다는 것은 무리겠지만, 못 이루면 못 이루는 대로 마흔이 되어도 안 죽어도 좋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
만화책을 내는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갱지를 높게 쌓아놓고 6개월 동안 데생집을 베껴 그렸다. 그때 갉고 닦은 그림 솜씨가 <가정식 백반> 표지 디자인으로 빛을 발했다. 소설은 정말 재미있는 무협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음반과, 소설책과, 만화책인가 했더니, 고등학교 내내 했던 것이 음악 듣고, 만화책 보고, 무협소설 읽고, 비디오 본 것이, 전부라고 한다. 당시 듀스, 김진표, 디제이 DOC를 들으며 락을 통해 랩을 접했던 것이 지금 힙합을 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긴 산고 끝에 탄생된 첫 CD는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멀리 마산에 있는 묘소를 찾기도 전에 선지급을 해준 고객들에게 빚부터 갚아야했던 것이 못내 죄송하다. 자식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삶’을 권유하는 고매한 인격의 어머니가 순서가 밀렸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실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윤동지의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누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고 했지 힙합하라고 그랬냐’고 하실 수는 있을 것 같다. ㅋㅋㅋ
영국에 관광하러 갔다가 운동에 눈을 뜨다
어린 시절, 윤원필 당원에게는 딱히 꿈이랄 게 없었다. 막연히,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을 둔 가장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교수이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인, 교육자 집안에 태어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딱히 아쉬운 것 없이 자란 배경 탓일까? 의외로 곱게 자란 그가 어린 시절 꿈과는 점점 멀어지며 험한 집회현장마다 참가하게 된 계기가 흥미롭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선배들이 집회에 나가자고 하면 도망 다니거나 피했다. 집회의 전체주의적인 분위기 싫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마산에서 유명한 무학소주에 입사했다. 지인들은 윤원필 동지에게 딱 어울리는 회사라고 했지만, 입사 3개월도 안 되어 뛰쳐나왔다. 아침마다 넥타이 매고 틀에 짜인 조직 생활을 하는 것이 도저히 생리에 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02년 말에 영국 에든버러에 관광하러 갔다가 이라크 참전 반대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의 집회는 한국에서 보던 시위와 확연히 달랐다. 획일화되지 않고 소규모 단위에서 개인이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운동의 가능성이 보였다.
그리고 2008년, 촛불집회에서 영국 에든버러의 반전집회와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개개인의 힘으로 조직화 없이도 운동이 가능하겠다고 느껴서 당시 진보신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사람을 잘(못) 만나 힙합하는 당직자가 되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진보신당 도봉 당협에서 활동한 윤원필 동지는 당시 도봉 당협 위원장이었던 이상호 당원의 권유(어쩌면 회유와 압박)으로 사무국장을 맡게 된다.
처음 진보신당 도봉당협 사무국장을 맡을 때만 해도, 워드나 좀 쳐주고 일 좀 도와주는 사무직 정도로 생각했지만, 결국 사람을 잘(못) 만나 중앙당 비정규노동실 실장을 거쳐 현재 도봉 당협 위원장까지 연임하게 된 것이다.
음악 편집 프로그램인 큐 베이스에 의지해 맨땅에 헤딩만 3년을 한 끝에 제법 곡이 곡 같이 만들어진다고 느껴지던 무렵이, 도봉당협 사무국장을 맡게 된 시기와 맞아 떨어진다. 당시 도봉 당협은 건물의 4층에 있었던 터라 이웃주민들이 도봉 당협 남자 활동가들을 ‘4층 총각’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4층 총각’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힙합과 당직자가 만나 독특한 거리의 음악 탄생의 태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4층 총각’이라는 작명부터 당과 연관되어 있었으니 ‘힙합하는 당직자’는 탄생될 수밖에 없었던 거 같다.
윤원필 당원은 애당초 운동권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힙합이라는 게 어려운 용어나 개념어로 만들어 진다기 보다 대중들이 자주 쓰는 단어들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곡을 만들어서 오디션에 보내볼 생각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늘 대중가수를 지향해 왔고(지양 아님), 주요 타겟층도 2030 여성들이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힙합하는 당직자’라는 숙명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첫 데뷔 무대도 당협 행사였으니 말이다.
2011년, 도봉 당협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공동출범식을 개최하였는데, 취소된 공연을 커버하기 위해 윤원필 동지와 이상호 전 도봉 당협 위원장이 무대로 올라간 것이다.
모든 극적인 데뷔 무대는 땜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첫 공연 이후 서울시당이 주체하는 행사에 한 번 더 오른 후, 단 세 번째 만에 재능 집회장에 입성한다. 거기서 민중가수 김성만 선배를 만나게 되면서, 그 후 끊임없이 집회장에 불려 다니게 되었다. 이삼십 대 여성을 타겟으로 대중적인 래퍼를 꿈꾸던 윤원필 당원의 야무진 포부는 집회 공연을 다니면서 다른 층위를 갖게 되었고 마침내 <가정식 백반>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여느 래퍼와 달리 실체 있는 대상을 항한 저항을 보여주다
<가정식 백반>에 민중가요라고 할 만한 트랙은 1, 2, 9번 트랙인 ‘탈환’, ‘광장에서’, 그리고 ‘붉은 달의 춤’이다. 앨범 제작을 위한 선투자를 해주고 자신의 노래를 들어줄 당 사람들을 위해서 신경 써서 만든 곡들이다. 앨범제작에 2년이나 걸린 것은, 비정규노동실에서 일하면서 집회를 쫓아다니느라 짬이 없었기도 했지만, 타게팅을 이삼십 대 여성으로 잡은 전략의 실패를 깨닫고 수정하느라 시간이 소요되었다.
힙합에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났다’는 자의식의 과잉이 들어있기도 한데, ‘탈환’에 그런 면을 넣고 싶었고, ‘광장에서’에는 메시지는 담되 대중성을 획득하고 싶었다.
굉장히 많은 래퍼들이 반항과 싸움을 베이스로 깔고 가는데, 대상은 명확하지 않다. 실체 없는 대상을 적으로 삼다보니 사회 전체에 대한 막연한 불만을 토로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반면 ‘탈환’과 ‘붉은 달의 춤’은 명확하게 적과 상황을 설정해놓고 풀어낸 랩이다. ‘탈환’은 공장 밖에서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싸움을 시작하는 대치 상황을 그린 것이고, ‘붉은 달의 춤’은 천막농성장을 지켜내는 상황이다. 그에게 익숙한 현장의 모습을 랩으로 그려내고 싶었다.
의미보다는 형식으로 타이틀명을 정하다
4층 총각의 1집의 타이틀은 <가정식 백반>인데, 1집에 담겨진 10곡을 타이틀이 가지는 의미로 묶어 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타이틀에 어울리는 곡은 4번 트랙 ‘밑반찬 1’과 10번 트랙 ‘밑반찬 2’ 정도다. 그나마 랩이 없는 기악곡이다. 이번 음반을 의미로 묶었다기 보다 형식으로 묶었다는 것이 윤원필 당원의 설명이다. 가내수공업, 즉 홈 레코딩으로 제작된 앨범이라는 것을 표방하는 타이틀인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앨범을 내고 싶어 시작했는데, 제작 과정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 음반 시장의 부조리함이 보였고, 유통망이 개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비자가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한 곡을 클릭해서 들으면 6원의 수익이 떨어진다. 그 중 통신사가 3원을, 제작사와 창작자가 나머지 3원을 나눠 가진다. 1만원 벌기도 힘든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독립 음반 제작 의지에 불타게 되었지만, 홈 레코딩이다 보니 믹싱 능력이 떨어져 전반적으로 음반의 퀄리티가 떨어졌다. 2집 준비를 하고 있는데 2집은 사람 손을 좀 더 거쳐서 질적 향상을 조금이라도 꾀해보고자 한다.
홈 레코딩이었다고 하지만, 도와준 사람도 많다. 8번 트랙 ‘미친 듯이’만 노래를 직접 불렀고, 나머지 트랙들의 피쳐링은 품앗이로 도움을 받았다. 녹음실도 있었다. 느티나무 쉼터 캠핑장, 도봉 마을예술창작소, 중랑 민중의 집 등에서 녹음을 했다. 이와 같이 묵묵히 함께 걸어와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앨범이었다.
노동당이 해야하고 노동당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결국 사람이 힘이다. 노동당이라는 이름을 만들면서 어느 정도 노동당이 가야할 길은 정해진 것 같다고 윤원필 동지는 말한다. 지역 당협 위원장으로 역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며, 묵묵히 노동당이 가야할 길을 같이 걸어가자 말한다.
“노동당의 지역위원장은 달라요. 우리는 노동당이에요. 노동당이라는 이름자체가 가지는 함축적 의미가 있어요. 베이스를 깔아주고, 때로는 포용적이어야 하고, 때로는 더 냉정해야 합니다. 노동당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역할이 있다고 봐요. 노동당이 해야 하고, 노동당이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어요. 작지만 중요한 목소리를 계속 내는 일들을 조금씩 해야 합니다.”
래퍼를 실제 만나본 적은 없어서, 윤원필 당원이 만나본 래퍼 중에 가장 마음씨 넓은 래퍼일 수밖에 없다. ^^ 하지만 앞으로 전 세계의 래퍼를 다 만나게 되더라도 윤원필 동지가 가장 포용력 있는 래퍼일 것 같다. 힙합에 일자무식인데다가 아무리 급하게 잡힌 인터뷰라지만 인터뷰이에 대한 사전조사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던 인터뷰어에게 무안을 주지도 않았고 싸움을 걸지도 않았다.
래퍼로서의 저항정신을 투쟁 현장에서 구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구석진 곳에서 낮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윤원필 당원. 누군가 차별을 받고 있거나, 해고를 당했거나,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윤원필 동지가 함께 할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고 고맙다.
[글: 최윤정 (노동당 당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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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지 18호 숨은 예술 당원 찾기 내용입니다.
노동당 문화팟캐스트 '컬쳐쇼크' 9회 : 4층총각 윤원필당원과 함께
1집앨범 가정식백반을 낸 윤원필 당원
- 진행: 황종섭 노동당 서울시당 조직국장, 백야 노동당 서울시당 총무부장 - 초대손님: 윤원필 - 노래 : 단편선과 선원들 - 노란 방 - 녹음·편집: 나비 노동당 서대문당협 당원, 박성훈 노동당 홍보실장
* 녹음: 2015년 2월 12일 목요일 / 발행: 2015년 2월 14일 토요일 |